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오랜 시간 동안 서울의 중심지는 종로였다. 일제 강점 식민지기 일본인들에 의해 종로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 경제, 문화의 헤게모니가 다른 곳으로 이양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주요한 거류지로 '본정'(오늘날의 충무로) 일대를 개발했다. 그리고 그 배후지로서 '명치정'―오늘날의 명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 김미선은 여성학 연구의 일환으로 근대 도시문화의 선봉이자 상징이었던 명동이라는 공간을 근대 이전 (혹은 근대화기에도 여전히) 남성 관료 중심이었던 종로와 대비해 재조명한다. 한편으로는,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 중앙역, 은행, 우체국 등이 몰려 있으면서 일본인 거류자들의 생활용품 소비가 주로 활성화했던 본정과도 구별하여, 주로 조선 여성들에 의해 미용·양장·다방·영화·연극(여성 국극) 등 새로운 소비문화가 부상했던 명동, 여성들이 생산/노동의 주체가 되고 동시에 향유/소비의 주체가 되었던 해방 이후 근대화기의 명동을 풍부한 사진, 그림, 기사 등의 자료와 당사자들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재현한다.
저자는 '사치'라는 말로 쉽게 제단되곤 하는 여성들의 소비문화를 여성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긍정한다. 당시 여성들의 패션, 취향, 유행 등을 재미나게 소개하는 것은 별책부록과 같은 재미를 주기도 한다. 명동에서 일었던,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한국사회에 불어넣어진 활력의 분위기를 포착한 저자는 그 원류가 바로 이 소비하는 여성, 즉 근대적인 여성 주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나 서술은 약간 빈약하게 느껴진다. 물론 저자도 책의 말미에 국내(외) 경제(및 정치)적 상황을 보다 실증적으로 검토하여 근대화기 명동의 문화상이라는 연구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후속 연구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언급한다. 이 책(연구)에서 그것까지 다루는 것은 당장 무리였다고 해도, 그 시대의 분위기나 대중들의 감정과 인식과 같은 질적 측면에서 기술 자료나 증언 등을 좀 더 풍부하게 활용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구술 증언자들은 대개 5~60년대에 명동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한 여성들인데, 그들이 느끼고 기억하는 명동 외에, 명동 주변부나 차라리 비수도권 지역과 같은 곳에서 명동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진술이 더해졌다면 명동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명동이라는 일종의 기호가 가진 의미, 한국 사회 전체에서 차지한 상징적 위치 등을 유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기대에 못미치는가, 하고 실망이 찾아오려던 순간, 이 책은 마치 내내 고전하던 유력한 메달 후보가 경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 한 방으로 뒤집기 한판승을 해내듯 이 책이 지닌 강점이자 매력을 드러냈다. 저자가 인용한 당대의 몇몇 이름 있는 남성 문학 작가들은 명동의 도시적인 활기와 화려함에 감탄하다가도 환멸을 느꼈는지 결국 '데카당'적인 공간이라고 명명하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명동 아가씨'들은 사회를 데카당의 수렁에 점차점차 빠져들게 하는 '사치' 소비 주체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에 상품을 공급하는 곳도 있으리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이다. 이 책은 명동의 백화점이나 잡화점을 가득 채운 대량생산된 공산품 소비재들이나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수공예품들이 온 길을 뒤따라가지는 않는다. 대신, 명동에서 여성들이 주로 향유/소비한 상품이 미용 서비스(머리, 피부, 화장), 양장(기성복이 등장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상품은 전근대 한국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 즉 근대적인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상품들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미용사, 양장사 등은 식민지기 말부터 60년대(이 책이 다루는 범위)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자리였다. 여성의 경제 활동(가사노동 외의 임금노동)이 사회적으로('남성'의 시선으로) 공공연하게 장려받은 소수의 경우이기도 했다. 책을 보면, 미용사나 양장사 자격증이 처녀가 마련할 수 있는 최고의 혼수라고 평하는 당시의 신문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들은 식민지기 일본인 기술자에게서 배우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직업학교에 등록하거나 '시다' 생활을 하며 일을 배우고 또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책에 인용된 자료들을 보면 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서 당시에도 진단이나 조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상에만 머무르거나 노동권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약해서 실질적인 개선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듯 하다. 당시 유명 여배우가 명동의 미용 노동자들의 하루를 옆에서 보고 기록한 일일 기자 체험 기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섬세한 감성으로 그들의 고단한 일과와 노동 강도, 직업병으로 앓은 위장병 등을 전했지만 파급력이 미미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이 수차례 좌절되었다. 미용 업체나 양장점이 애초에 중소규모로 명동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도 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어마어마해서, 노동자들이 시간을 내어 직접 모여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사용자들로부터 방해를 받는 것도 물론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대 이후의 여성 노동 운동을 알고 싶다면 한국 여성 노동운동사에 관한 책이나 연속 기사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 두 개의 큰 줄기로 구성되어있다. 각각의 줄기에서 근대적인 문화로서 부상하기 시작했던 명동의 소비문화와 그 주체였던 여성, 그리고 명동 소비문화를 일구어낸 또다른 한 축인 생산/노동 주체였던 여성이 겪은 감정, 체험, 노동(조건), 사회적 평판 등을 서술한다. 저자는 그 두 줄기를 아우르는 결론으로 명동이라는 근대적 도시 공간에서 소비와 생산의 주체로 행위했던 여성이 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주체성/여성상을 형성/획득했다는 점을 제시한다. 구술 증언에 참여한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 속에 그것들은 여러가지 말로 녹아있다. 여러가지 말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자립적, 진취적, 적극적, 능동적, 사회적(가정과 대비된 '공적 주체'로서의 여성), 자기 표현적, 자기 효능감 등등.
책장을 덮었다. 궁금한 점이 하나 남는다. 명동은 여전히 매우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번화가이다. 식민지기부터 본정의 배후지로 개발되면서부터 명동으로 변모하는 동안, 지대가 오르고 부동산 투자(혹은 투기)도 행해졌을 것이다. 여성들의 노동과 여가·오락의 장이었던 명동의 건물과 땅의 소유주, 즉 부동산 자본에 관한 내용이 당사자들의 회고나 증언 수준으로나마 언급되었다면, 또는 그에 관한 후속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명동 공간을 바라보는 젠더적 관점에 또 다른 사실과 관점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는 다음의 가설이 전제되어 있다. "명동 공간의 지대-부동산은 젠더화한gendered 자본이었을 것이다." 얼핏 혹은 정말로 여성 주체들의 활발한 행위의 장이었던 것 같은 명동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은 누구였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