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흔히
이 이야기를 쓰기위해 작가가 되었다거나, 작가가 되면 꼭 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거나 할 때 그 이야기는 대개 그의 가족사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 작가는 영화처럼 재생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사실의 얼개와 허구의 디테일 속에 담아낸다. 기억이 흐트러질 수록 상상력은 더 확장되므로 애써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래서 사실과 허구는 뒤엉키고, 기억에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자전적 소설이란 대개 그렇다.
저자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자는 어떻게 자전적 기록을 남겨야 하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오래된 기억은 파편적이다. 사회학자는 작가가 아니므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없다. 이렇다 할 기록이나 사진도 없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일생을 사회학자는 기록으로 남겨서 그들의 영전에 헌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에 이름 석 자 한 번 올린 적 없는 부모의 그저 그런 일생이 무슨 관심이나 끌겠는가.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그 후 1년 남짓 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허물어진 기억과 어머니의 짧은 증언만을 가지고 사회학자는 고민했다. 지극히 사회학적으로 재현해내야 했다. 파편화된 기억의 큰 틈을 매운 것은 영화였다.
부모의 성긴 기억을 날줄로 하고, 당대를 풍미했던 영화들을 씨줄로 하여 사회학자는 조밀하게 관찰하고 이야기들을 엮었다. 막연한 추정이나 상상 없이 매우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한 가족의 현대사를 재구성해 냈다. 작가의 글을 자전적 소설이라 한다면 사회학자의 이 글은 자전적 다큐멘터리라 할 만하다. 누구나 가지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회학자의 직업적 소명이 걸작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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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학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평생을 그저 자신의 ’기구한 팔자‘라고만 생각했던 인생의 굴곡 뒤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아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사회학자가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의 성격을 꼭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주변사람들은 힘들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를 앓다가 눈을 감았고, 어머니는 너무나 얌전하게 소리 소문 없이 병을 앓다가 끝까지 곱고 침착한 모습으로, 병문안 손님 대접에 막내아들 점심까지 챙기고 난 뒤 두어 시간 만에 가만가만 인생극장을 떠났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르기에 인생극장의 막이 올랐고, 그 막은 다시 내려가야 한다. 나의 부모가 인생극장의 무대에 올랐다가 퇴장하고, 나는 그 무대를 물려받았다. 무대 장치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부모를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무대 장치 또한 투덜댄다고 바뀌지 아니하니 그것을 원망하며 째려보기 보다는 찬찬히 살펴보는 편을 택하는 게 더 현명할 지도 모른다. 유산이 꼭 ’재산‘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건 아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자식은 부모와 장례식을 통해 의례적인 이별을 마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말은 장례식에서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자식이 부모에게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마지막 말은 장례식이 끝나고도 한참 후, 이별로 인한 고통의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 부모를 부모로서만이 아니라,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살았던 자연인으로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떠오른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