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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델라
  •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 알파고 시나씨
  • 18,900원 (10%1,050)
  • 2016-08-20
  • : 233

5만원권 지폐를 만들려고 할 때 어떤 인물을 모델로 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지금의 신사임당으로 결정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다. 화폐의 인물이 모두 조선의 유교적 색채가 짙은 인물들이고, 신사임당이 우리나라 여성의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김구, 윤봉길,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왜 배제되는 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외국의 화폐 인물들은 대개 그 나라의 건국, 독립영웅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화폐인물을 소재로 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어떤 분야건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낸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기획자체가 매우 신선한데, 더 놀라게 한 것은 외국인(저자는 터어키인이다)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는 점이다.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컨텐츠라고 해도 문장이 허술하면 책은 읽히지 않을 것이고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책의 글이 아주 좋다. 전문가의 퇴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국인이 쓴 문장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돈된 글이다.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에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역사적인 인물도 나오지만 대부분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눈에 띄는 대로 익숙한 인물들, 조지워싱턴, 제퍼슨, 링컨, 간디, 마오쩌둥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는 깊은 지식이 없었으나 호기심을 느낄 정도는 아니어서,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읽었다. 한 나라의 화폐에 실릴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항상 함께 하고 싶은 영웅이었을 것이므로 그 인물들의 간단한 역사라도 알아 둔다면 언젠가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공통된 현상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가장 고액권에는 대개 건국영웅이나 독립영웅이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돈인 100볼리바르에는 독립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인쇄되어 있는데, 화폐의 주인공이 바로 돈의 단위다.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돈 단위가 ‘원’이 아니라 ‘세종’이 되는 식이다.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지역 전체를 독립으로 이끈 전쟁영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존경심이 얼마나 컸으면 이름을 화폐단위로 삼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좀 더 특이했던 건 국가의 영웅만이 아니라 예술가를 화폐의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다. 프리다 칼로가 유명한 화가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 화폐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칼로가 화가일 뿐 아니라 멕시코 문화의 정체성을 알린 아이콘이었고 여성의 권익을 위해 정치적인 목소리도 활발하게 내었다는 건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역시 사회변혁을 위한 노력이 있어야 국가적인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거다.

 

저자의 고향인 터어키공화국의 건국영웅 케말 파샤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터키 화폐의 5리라짜리에는 케말파샤의 측면사진이 있는데, 화폐의 액면가가 올라갈수록 초상화가 점점 정면사진으로 변하고 살짝 미소짓는 모습에서 200리라에 이르면 완전히 웃는 모습으로 바뀐다. 그래서 터키에는 ‘돈이 없으면 케말파샤도 웃어주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책은 소재의 특이함 만큼이나 화폐의 인물들 면면도 특이하다.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업적을 남긴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한 국가의 탄생과 성장에 기여한 인물이나 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낸 인물, 개인이 처한 시대의 역경을 극복하고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둔 인물들이 골고루 표상되어 있다. 우리나라 화폐도 이제 유교적 전통을 상징하는 특정 시대의 인물에 국한되지 말고 시대와 역사를 아울러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변혁적인 인물들이나 미래지향적인 인물들을 후보로 올릴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런 특이한 소재의 책이 호기심을 주기에는 충분하나, 자칫 기존의 개방된 정보들을 단순하게 편집하고 나열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책의 깊이를 놓칠 수 있다. 이 책도 다소 그런 측면이 있으나 이런 정보가 하나의 책으로 엮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장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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