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교양서라고 하면 대개 사회를 떠들썩 하게한 사건 중심의 법창야화식 넌픽션이거나, 법조인 특히 판검사 출신의 자기자랑식 무용담이거나 부끄러운 사법의 역사를 파헤치고 고발한 책들이 주류를 이룬다. 가끔은 법이론에 기반한 밀도 높은 책들도 출판되기는 하였으나 어려운 법률용어에 기가 질리고 만다.
‘법의 지도’는 참 독특한 영역의 법교양서다. 이제까지의 접근과는 전혀 다르다. 법과 정치, 사회, 경제의 영역이 겹치는 모든 교과서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학문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 우선 현대사회를 규율하는 법제도들이 어떤 역사적 기반에서 태동하였는지를 밀도 있게 풀어내면서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례들까지 꼼꼼하게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법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상당한 철학적인 담론까지도 다루고 있어서 책을 더욱 깊게 읽도록 유도한다. 특히 일반인의 평균과 배심제도(책에서 언급한 영화 ‘12인의 성난사람들’을 VOD로 다운받아 두었다), 식민시대에 대한 통찰, 규제와 공무원집단의 역학관계, 소득에 따라 벌금을 달리 매기는 징벌적 벌금제도, 재정위기를 대하는 유럽국가들의 태도를 다룬 부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경제, 국제금융분야를 다룬 부분에서는 속도가 다소 더디게 넘어갔으나 국제금융시장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현재 우리사회와 국가, 국제관계에서 유효하게 돌아가는 법과 제도가 어떤 기원에서 유래한 것이며 현실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역작용이 있는지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을 두 번 정도는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책이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인데, 밑줄을 긋지 않은 페이지가 없을 정도로 공감이 가고 인상적인 책이었다. ‘법의 지도’를 다 읽고 난 다음에야 두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란 걸 알았다.
책을 읽으며 무수하게 밑줄을 그었으나, 대략 네부분만 추린다.
.., 하지만 구성만이 그들(배심원)에게 일반인의 평균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의 일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편견과 무관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평균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실지로는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 p68
투명성 기구 증 국제기구에서 발표하는 부패지수를 살펴보면 식민의 시대를 거친 나라들이 대체로 부패지수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 역시 경험의 산물이다. 식민의 시대에서의 자원배분은 조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식민지를 지배했던 지배세력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부와 권력을 축적하기 쉬웠다. 지배세력은 식민지배에 우호적이거나 협조적인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힘을 집중시켰다. 그 힘은 법을 우회하거나 법의 예외를 만들어냈다.. 해방이 된 후에도 그러한 사회적 역학관계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 p82~83
규제를 규제해야 하는 이유 중 한가지는 규제가 부패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규제를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막강한 힘을 갖는다. 그리고 해당규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고 싶다면 공무원을 통할 수 밖에 없다. 법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그 법이 재량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입법 기술 및 행정현실상 재량을 두는 것은 불가피하다. / p 189
위기를 맞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한 이익이 존재하고 힘이 있는 집단이 그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하면서 사회적 균형이 깨진다. 그리고 위기가 또 찾아오고 고통은 모두가 공유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법과 제도의 역할이다. 사회적인 균형 또는 견제기능이 발휘됨으로써 리스크의 크기가 과도하게 커져가거나 혹은 사회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행위들이 적절한 선에서 견제되는 메커니즘이 있었야 한다. 그 메커니즘이 바로 법이다. 법을 공부하거나 업으로 한다는 것은 단지 법조문을 읽고 해석하고 소송기술을 활용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제 법률가들도 사회적 큰 흐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크고 멀리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 p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