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화 작가는 이미 페이스북과 언론 칼럼을 통해, 세련되고 힘 있는 글을 보여주고 있는 분이다.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는 전문가의 시선과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대중의 시선을 아우르며, 우리 사회의 복잡한 현상과 난제들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쉽게 설명해내는 능력을 가진 대체 불가의 작가다.
같은 사람이 쓴 SNS의 글, 신문의 글, 책의 글은 각기 글쓴이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지만, 그 글들이 독자에게 닿았을 때의 느낌은 모두 다르다. SNS 글은 뇌에서 손끝으로 직진하는 날 것 그대로의 활달함이 있고, 신문의 글은 몸통만 정형하여 보여주는 각 잡힌 절제미가 있다. 책은 자유와 절제를 아우르면서 작가가 가진, 고유하면서도 깊고 내밀한 세계로 이끌어 준다. 그 세계를 통해 독자는 작가의 끝없는 지적 모험과 폭넓은 문화적 취향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작가의 집요한 탐구 정신과 남다른 체험으로 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생생한 현실을 목격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이슈가 넘쳐나서 지루할 틈이 없는 나라, 작으면 작은 논쟁이 크면 큰 논쟁이 벌어진다. 사실, 논점에 웬만큼 정통하지 않고는 전방위에서 터져나오는 공격과 방어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쪽이든 군말 없이 잠재울 수 있는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렵다. 편견, 오독, 논리비약, 확증편향과 싸우는 일은 피곤하고 소모적이다. 말과 말 아닌 것이 부딪치는 싸움에서 결국 터져 나오는 말이 “그래 니 말이 맞다.” 이다. 무지와 고집은 꺽이지 않으라고 존재하는 것이라는 용맹함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그래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무게의 추를 조절하며 합리와 부조리, 현실과 이상, 관념과 실질, 왼편과 오른편의 세계에 대해 집요하게 설명하고, 적어도 세상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당위를 담담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고층 건축현장에 높이 솟은 거대한 크레인, 그런 크레인에는 웨이트라는 장치가 있다. 우리말로 하자면 무게추, 균형추라고 할 수 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크레인 긴 붐대 반대편에 시루떡처럼 생긴 강철 덩어리가 몇 겹으로 장착되는데, 200톤급 크레인에 필요한 웨이트의 무게만 70톤을 넘는다. 크레인이 클 수록 웨이트의 무게도 늘어난다. 크레인의 크기에 비해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멀리서 보면 그런 게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그게 없으면 크레인은 홀로 지탱하지 못한다. 박선화 작가의 글을 볼 때마다 나는 거대 크레인에 설치된 웨이트를 생각한다.
그 웨이트는 사회 일반을 향해 작용하기도 하지만, 더 큰 기능은 글을 읽는 독자를 향한 작용이다. 모든 의견은 자칫 극단으로 흐를 수가 있다. 많이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자신의 제한된 경험치에 사회적 압박이 가중 되면 놀랄 정도의 편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내 속에서 일어날 때, 혼란스럽고 스스로에게 경책 할 수 밖에 없으나 그런 식의 내적 붕괴를 저 쪽에서 강한 무게로 잡아주는 글이 바로 박선화 작가의 글이다. 그런 글을 휴대폰만 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인데, 책이 나왔으니 책으로 보자. 이제 다이닝 레스토랑에 앉은 것처럼 여유를 가지면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음미해 보자.
그리고, 괜히 끌린 한 단락.
‘외로운 인생길에 내 편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내 편은 한통속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경계를 드나드는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진정한 인류애를 고민해야 할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라면 더욱 자신의 위치를 중심이 아닌 경계에 세우는 노력을 쉼 없이 해야 한다. 배타적인 형제애와 신념은 담합이 되고, 굳건해질수록 더욱 강력한 악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려면 홀로 서야 한다.’ (191쪽)
덧, <언제부터 사람이 미워졌습니까> 제목 한 번 잘 지었다. 언제부터인지, 왜인지는 모르겠고 요즘 내가 그렇다. 나만 그렇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