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집’ 치고는 너무 일상적이다. 쉬워서 일상적인 게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일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직접 목차까지 정해 준 에세이라는데, 감상적인 회한 같은 건 없고 오히려 학술적인 에세이집에 가깝다. 전작들에서 보여 준 대중적인 태도를 잃지 않은 채, 더 넓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의 윤곽을 제시하고 2주후에 세상을 떠났고, 책은 결국 유고집이 되었다.
제목에 ‘의식’이 들어가 있지만 의식을 정면으로 다룬 책은 아니다. 생명현상, 진화, 시간, 기억, 신경병증, 과학철학 등 색스의 관심분야를 폭넓게 이야기 하고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같은 전작들을 읽었다면 다소 익숙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으나, 그런 전작들이 신경의학자로서 임상경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 책은 생명과학영역에서 이슈가 되는 주제들을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서술하고 있어서, 전방위 생명과학자로서의 올리버 색스를 만날 수 있다.
교과서적인 진술들 사이에 색스 특유의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온다. 여러 책에 자주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환자들은 물론,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나 전혀 다른 분야 천재들의 숨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흥미롭다. 그의 책들이 모두 그랬지만 꿋꿋하게 끝까지 책을 놓지 않게 하는, 그런 힘이 있는 책이다. 쟁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색스의 책이 여러 권인데, 이제 더 나올 책들도 없을테니 죽기 전에는 다 읽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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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_자아 (unconscious self)
푸앵카레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에 골머리를 싸매다가 기분 전환을 위해 한 여행 중에 전광석화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라 문제를 풀었다는 두 번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푸앵카레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어떤 문제가 의식적 사고에서 벗어나 마음이 텅 비었다거나 다른 일에 한눈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뭔가 능동적이고 강렬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또는 전의식)이 작용하는 게 틀림없다.” 푸앵카레가 말한 무의식은 역동적·프로이드적 무의식과 다르고, 인지적 무의식과도 다르다. 프로이드적 무의식은 억눌린 공포와 욕망으로 들끓으며, 인지적 무의식은 아무런 의식 없이 승용차를 몰거나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말하도록 추동한다.
그에 반해 푸앵카레가 말한 무의식은 완전히 숨겨진 창조적 자아(creative self)가 수행하는 고도의 숙성 과정으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매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푸앵카레는 이 무의식적 자아에 찬사를 보냈다. “무의식적 자아는 단순한 자동기계가 아니라, 분별력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는 선택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알며, 의식적 자아보다 예측력이 뛰어나다. 왜냐하면 의식적 자아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p157~159
#인간의식 (human consciousness)
‘우리 인간은 언어와 자의식, 과거와 미래에 대한 뚜렷한 감각을 발판으로 하여 비교적 단순한 1차 의식에서 고차의식, 즉 인간의식으로 도약했다. 인간의식은 모든 개인의 의식에 주체적으로나 개인적인 연속성을 부여한다. 나는 7번가의 한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며,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본다.
.. 의식이란 늘 능동적이고 선택적이기 마련이므로, 나의 선택에 정보를 제공하고 나의 자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모든 감정과 의미는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7번가가 아니라 ’나만의 7번가‘이며, 거기에는 나만의 개성과 정체성이 가미되어 있다.
.. 우리가 수동적이고 공정한 관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도했든 말았든, 알았든 몰랐든, 모든 지각과 장면들은 우리 자신의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영화의 감독인 동시에 배우다. 모든 프레임과 순간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 의식의 밑바탕에 깔린 지각의 순간은 단순한 물리적 순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개인적인 순간들이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푸루스트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 자체는 사진술을 떠올리게 하고, 보르헤스의 강물처럼 서로 맞물려 흘러가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순간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p196~198
“시간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를 휩쓸어 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p175
페이스북 <과학책읽는 보통사람들>에 올린 글 @이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