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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성
  • 창비어린이 2023.가을
  • 창비어린이 편집부
  • 13,110원 (5%690)
  • 2023-09-01
  • : 102

오랜만에 <선생님을 위한 클럽 창작과비평>을 통해 서평 도서 신청을 했다. 2023년 가을호의 주 테마는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소설은 작년부터 역시! <선생님을 위한 클럽 창작과비평>을 통해 관심도가 많이 늘어난 분야인지라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때다!' 하고 잽싸게 폼을 작성했다. 이 자리를 빌어 창비에 무한 감사를...(내년에도 클럽 열어주세요...)

2022년에 사람과교육연구소의 정유진 선생님께서 진행하는 행복교실 14기를 수강했다. 교사 철학, 자기이해, 학급운영시스템, 학습이론, 프로젝트 학습법 등을 1년 동안 알차게 배웠다. 많은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개중 내 안에 크게 자리잡은 질답이 하나 있다. 어느 수업에서 나왔던 장면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학급운영시스템, 혹은 어린이왕국 프로젝트 내용을 공부할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한다.

"최근 모 유튜브처럼 현실을 정교하게 교실에 모방해 재현하는 학급운영방법이 유행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현실을 따와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 해, 나도 해당 영상을 보고 상당히 자극을 받아 내가 잘 다룰 수 있는 분야인 게임 시스템을 모방하여 학급을 운영해볼까 고민했던 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리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이 아닌지라 그 모든 계획을 접고 행복교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좌우간 나도 고민했던 지점인지라 정유진 선생님의 답이 기다려졌다.

"교실이 현실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사회에 나가면 다 겪을 것들. 지금 미리 겪지 않아도 괜찮다."

창비어린이 2023년 가을호를 읽으며 이 장면이 떠오른 까닭은 분명하다. 세 편의 특집이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에서 현실을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문제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모든 세대를 향한 냉소를 너무나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어린애들도 그 정도는 다 알아. 고등학생이 그걸 모르겠느냐. 이런 문구들을 읽을 때마다 섬짓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청소년은 청소년다워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이 참. 선생님, 저희도 알 거 다 알아요!' 라고 말할 거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나이에 어울리는 정서를 돌려주고 싶다. 알 거 다 알고 '쿨'하며 '힙'한 어른을 모방하는 게 아닌, 아이답고 청소년다운 정서를 말이다.

나도 현대인이기에 그리 독서량이 많지 않고 짬이 나면 유튜브를 보는 입장에서 책을 숭앙하고 뉴미디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결국 도구이기 때문에 진짜 문제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다. '시간의 효율을 따지며 지름길을 찾기보다는 "기꺼이 더 먼 길을 돌아가"는 경험을 선사'한다는 대목을 읽으며 한창 자라나는 이들의 정서를 좀 더 키워주는 매체는 활자매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성인 또한 그러하리라. 21세기에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지는 못 할 지언정 여전히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많이 갖춘 이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타인의 심상에 공감할 수 없을 때 그 지식이 어떻게 쓰이는지 못해도 최소 10년(15년...?) 전부터, 혹은 최근 1~2년 동안 많은 이들이 느꼈을 거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정서를 가장 많이 마주하는 입장에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서는 무시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두렵다. 유감스럽게도 교사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을 읽고 현장의 동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학생의 정서 또한 연구 대상일 교사 집단조차 정서를 '따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점점 강해진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나는 이 또한 두렵다. 참교육이 폭력으로 만사를 해결한다는 뜻으로 변질된 시대에 교육학도 교육철학도 없이 어린이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이 섬짓하게 다가온다.(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이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거다. 아이를 가진 교사들이 가정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그 답이 '그렇다'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고 싶다.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노동에 시달려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교직사회 구조가 어떻게 사회 구조와 동떨어질 수 있을까? 학교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상아탑인가? 학교를 작은 사회라고 말할 거라면 교사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청소년문학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 속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가진 정서라는 토양을 적셔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삶과 맞닿은 언어로 재현된 문학이다. 어떤 보호자들은 자신의 피보호자에게 실패라는 경험을 조금도 주고 싶지 않아 세상을 배양실로 삼아버리곤 한다. 그런 환경에 놓인 청소년이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실패와 좌절에서 비롯되는 희망을 자신의 것처럼 여길 수 있는 기회는 창작물에서 열리게 된다.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와 연관하여, 트위터(오늘날의 X)에서 한때 어린이 권장도서가 어린이의 정서에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냐는 문제가 화두로 돌았던 적이 있다. 해당 '플로우'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이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훨씬 컸다. 그냥 좋은 책이라면 다 목록에 올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의견도 제시되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아동청소년으로부터 슬픔과 고통을 거세시킬 수 없고 문학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오히려 세계의 폭이 넓어진다는 주장이 올라왔다.(정확한 표현이 이렇지는 않았다. 골조가 이러하였다. 후일 해당 트윗-이제는 게시물이다...-을 찾으면 첨부하겠다. 지원 환영.)

트위터(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트위터라고 하겠다)를 주 활동 무대로 삼는 서브컬쳐 향유층에서는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창작물 속 윤리적인 현실 재현 문제가 대두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논의는 꾸준하게 이어져온다. 그 논의는 서브컬쳐 창작물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에서 화제가 되는 다양한 창작물까지 뻗친다. 그때마다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은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치열한 고민 끝에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창작물은 그저 외설적인 전시밖에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아동청소년이 접하는 창작물은 어느 정도의 보호막을 둘러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재현의 언어를 청소년에게」를 읽으며 생각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시의적절하게 이 글을 읽어서 기쁠 따름이다.

청소년이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청소년문학에서 등장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도덕적 운에 모든 해결을 맡길 수도 없으며 '세상은 이렇게 잔인하다'는 냉소만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터무니 없는 희망사항을 말해보라면 작품에서 제시되는 문제 해결 방식이 마냥 탈정치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현장에서 나는 5학년 어린이들 중에서도 장르문학, 특히 여성작가들의 최신 SF 작품들을 읽는 어린이를 의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어린이들은 SNS에 능하고 어느 정도 서브컬쳐에 친숙하다는 경향성을 띠곤 했다. 최신 SF 작품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는 탈정치적이고 정치혐오적인 시선을 읽을 때마다 문학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아동청소년이 이를 구체적으로 언어화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은은한 시선을 내재화하는 과정을 생각해본다. 탈정치의 시대에 그 폐해를 겪는 건 이 시대를 사는 가장 평범한 일반 대중이다.

우리 학년에서는 온책읽기 활동을 진행하며 한 달에 책을 한 권씩 돌려 읽고 있다. 「긴긴밤」, 「세상을 건너 너에게 갈게」와 같이 교사도 좋아하는 유명한 아동청소년 도서들이 참 많다. 상술한 바 있지만 교사 집단은 그 누구보다 아동청소년을 많이 만나는 집단이다. 교사들이 학생의 정서와 청소년문학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본다. '인간화'에 다다르는 길에는 여러 길이 있겠지만 청소년문학도 그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한다. 좋든 싫든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 문제에 얽힌 학생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이지 않은가. 교사 집단 내부의 냉소를 해결하고 아동청소년에게 재현의 언어를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여기에 잠재되었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책임한 권력의 언어가 도처에 퍼지는 동안 사태를 재현 불가능한 것으로 남기는 쪽보다는, 이 괴물 같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재현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서는 편이리라.-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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