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실존 예술가들과 파스칼 키냐르의 가상 인물들,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그가 빚어낸 문학적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책에서 처음에는 조금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여 쪽의 페이지가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갔던 것은, 파도에 몸을 맡기듯 아름다운 문장들을 믿고 흘러가기만 해도 흠뻑 즐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물이 품은 욕망을 적나라할 정도로 훤히 드러내서, 종종 그 욕망이 더부룩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나는 그 외면하지 않음이 차차 좋아졌다. 꾸며내고 덧붙이지 않고, 벗겨내고 덜어내서 발견해 낸 원초의 아름다움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인물들의 삶 가장자리에 음악(을 비롯한 예술)이 늘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17세기 음악에 대해 잘 몰라도, 파스칼 키냐르에 대해 잘 몰라도 거뜬히 도전 가능한 책.
이 책을 읽은 열 명에게 가장 좋았던 장면을 물어보면 열 가지의 답이 나올 것 같다. 그 정도로 고르기 어려웠지만... 등장할 때마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해 주었던 말과 공녀가 자꾸만 떠오른다.
두 짐승-말과 공녀-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둘만 있게 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의식을 떠나, 모든 언어를 버리고, 모든 두려움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도록 내버려 둔 채, 숲의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가운데 숨을 쉬었다. 어떤 광대함이 돌아와 공간을 확장했고, 폐들을 증폭시켰으며, 코와 콧구멍과 눈을 넓혔다. 둘은 행복했다. (117쪽)
사랑에 타격을 입어 보지 않은 이는 사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P67
음악은 특출나게 감동적인, 어딘가 미쳐 버린 인식 같다. 세상 이전의 세상에 있던 것, 되찾으리라 더는 기대하지 않던 것과의 아연한 재회 같다. - P195
사랑이, 명백히,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남을까?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남는다. 한 세상이 남는다. - P316
내가 살지 못한 것을 향한 그리움이 나의 심연이다.- P461
그리고 모든 위험과 숲이 지닌 저 모든 아름다움 사이에서 계속 자유로우려면 두려움 속에서 떨기를 멈추지 말아야 해요. - P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