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쉬운 내용은 아니라 술술 읽히진 않지만,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된다. 1970년대에 영미 여성문학을 가르치던 두 여성이,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페미니즘을 통해 비평하고 있는데 도무지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여성 작가들이 겪어야 했을 차별은 얼핏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실제적인 텍스트로 보면 그 비난의 수위가 견디지 못할 만큼 악랄하고 유치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는
여자는 자연을 거스른다고 간주되’고(155쪽), ‘굴복하지 않는 여자는 그저 신경증적인 여자일 뿐이라’는(163쪽) 것이 당연히 여겨졌던 시대에 어떻게든 펜을 들어 글을 써낸
여자들. 전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던 ‘문학’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에서 이 여성들은 어떻게 글을 썼을까.
1부는 당시 문학장이 얼마나 여성 작가(독자)들에게 배타적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앞으로 이어질 내용을 가볍게 예고한다면, 2부부터 5부까지는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에밀리 브론테, 샬럿 브론테,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을 직접 다룬다.
읽다 보면 내가 작품을 정말 겉핥기로만 읽어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와 레이디 캐서린이 실은 굉장히 닮아 있고, 고로 캐서린이 어쩌면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리는 어머니’라는 것. ‘엘리자베스는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 캐서린을 닮아 있다. 결국 이들만이 이 소설에서 진정한 분노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여자’(338쪽)라는 것은 엘리자베스와 캐서린을 일종의 대결 구도로만 봤던 나로서는 전혀 포착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관계성을 분석한 부분도 진짜 재밌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채찍이고, 또 다른 자아이자 분신이며, 캐서린의 존재를 보충하는 부가물이’므로,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의 결합을 통해 완벽한 양성적 존재가 된다’(484쪽)는 건 흥미로움을 넘어 뭔가 짜릿하기까지 했음.
6부에서는 19세기 여성 시인들의 작품들을 분석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들에 쓰인 ‘거미줄’과 ‘바느질’에 대한 해석. ‘거미의 기예와 그것이 상징하는 여성 예술의 모호한 속성’, 그리고 거미줄과 여성 예술 둘 다 ‘검열관 같은 주부의 빗자루에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는 거미와 여성의 바느질로 연결되며, 브론테가 시 속에 직접 써넣은 대시(-)가 ‘분열된 생각을 솔기마다 접합시켜주는 섬세한 바늘땀’(1081쪽)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해석은 정말 재밌음. 더불어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작품이 왜인지 맑고 차분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강렬하고 분노하는 시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구...
여성 작가들이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글로 읽으니 더 좋다. 시대적 한계로 인한 불편한 부분들이 있다는 이유로 고전 작품을 자주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 내는 독서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쉽게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른 시각으로, 다양한 자세로 읽어보는 것. 그래야지 내가 디딜 수 있는 땅이 더 넓어지겠지, 이 책을 쓴 두 여성이 여성 문학의 땅을 단단히 다져 주었듯이.
분량도, 내용도 어려웠지만 완독하고 보니 '필독서'라는 간명한 추천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펜’에 의한 창조물로서 ‘감금되었다.’ 여성은 남성이 내뱉은 ‘문장’으로 (사형이든 징역형이든) 형을 ‘선고받았다.’ 남성은 여성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기소했다.’ 여성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사고에 따라 남성의 텍스트, 그림, 그래픽 속에 갇혀 있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우주론 속에서 (죄 많은 결함투성이로) ‘날조되었다.’ - P89
예술의 마력은 남성의 신화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성들을 다시 살려내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광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걸까? - P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