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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님의 서재
  • 1939년 명성아파트
  • 무경
  • 15,750원 (10%870)
  • 2026-02-11
  • : 8,900
#도서협찬

어른이 되면 보이는 게 달라지니까.(p.56)

한 번에 하나씩 해야 해.(p.270)

이 흉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당이 되어야지(p.340)



마냥 우둔한 것 같지만 열두 살 ‘입분’은 제법 기민한 눈치와 뛰어난 관찰력을 지녔다.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전전하는 삶에서 스스로 체득한 능력일 것이다. 불야성으로 빛나는 경성의 복판에서 가진 것 없는 조선인 소녀가 살아남기 위한 나날이 펼쳐진다.

독신자 아파트, 입분의 눈에 마치 성처럼 보이는 ‘명성아파트’는 산 중턱 절벽 바로 아래 위치해 있다.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지닌 이곳의 입주민들은 사연도 직업도 나이대도 제각각 나름으로 다양하다. 입분의 마님 역시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라이스카레가 먹고 싶다고 대답하는(p.59),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다.

소설은 독자를 줄곧 이 기이하고 불신 가득한 명성아파트에 붙들어 둔다. 아이스고히와 백화점, 조선 땅의 금맥, 순사,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일제강점기 생활상을 다방면에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독립을 주창하는 정의와 친일로 복종하는 배덕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신에 인간의 욕망과 양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람은 완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p.189)기에 모두가 다 살인사건의 용의자처럼 보이고, 살인 현장에 붉게 쓰여진 ”대한독립 네 글자“는 소리내어 말하기 무섭다. 멋진 성채같던 아파트는 이제 범인이 숨어있는 마굴같기만 하다.

사건을 뒤쫓는 입분의 시선은 서투르고 투박하지만 “한 번에 하나씩” 허점을 분석하고 용의자를 소거해나간다. 범인을 잡지 않고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화(p.269), 그 분노를 들여다보는 입분의 모습, 때묻지 않은 마음을 자꾸만 응원하게 된다.

1939년의 혹한 여름은 입분을 훌쩍 자라게 만들었다. 정교하게 그려낸 시대상과 촘촘한 트릭이 맞물려서 더 흥미롭다. “이 흉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악당이 되어야”(p.340)한다는 마님은 “신성한 네 글자를 모욕“(p.341)하는 것만큼은 단죄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리고 마님과 한편이 되고싶은 입분은 인간사 모든 일이 그저 선과 악으로만 나눌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입분보다도 관찰력 없는 나는 그저 책장을 급히 넘기며 따라가기 급급했다. 뒤로 갈수록 활자를 빨리 읽어내고 싶은 욕망과 아껴읽고 싶은 마음이 서로 겨뤘다.

자신의 속도로 불의에 맞서는 입분과 무덤덤한 마님의 남은 날들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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