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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다 철이 있는 거야. 철이 드는 때도 있고, 또 지날 때도 있지.
똑같은 시간이라도 모두 길이가 달라. 아니, 시간의 길이는 똑같은데 마음속에서 시간을 길게 느끼기도 하고 짧게 느끼기도 하지. 그 시간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로 ‘철‘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거야. 그러니까 ‘철이 든다‘는 것은 바로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 P12
어머니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자식들은 어머니의 귀중한 노동을 통해 성장합니다. 가슴으로만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죠. 어머니가 걸은 발자국이 바로 사랑의 흔적이고,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죠. 자식들은 머리와 가슴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알아요.
그러나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죠. 하지만 어머니의 발을 직접 만져보면, 즉 터치하면 어머니의 노동과 사랑은 눈에 보이는, 만져지는 실체로 다가옵니다. 진짜를 만나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

지금 힘없이 떨리는 저 손이 바로 내가 처음 발을 딛고 일어설 때 잡아주셨던 그 손이었습니다.
땅바닥에 넘어져 무릎을 깼을 때 울던 나를 일으켜 세우시던 그 손.
코 흘릴 때 훔쳐주시고 눈물 흘릴 때 닦아주셨던 손.
이제는 매를 들어 때리셔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가랑잎처럼 야위신 손.
꼭 잡아드리세요. 언젠가 나를 잡아주셨던 아버지의 그 손을.- P24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할 때에는 부자가 함께 웃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을 할 때는 부자가 함께 운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주는 선물은 자연 현상이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선물은 문화 현상입니다. 인간만이 할 줄 아는 행동이기에 감동이 따르는 것이지요. 그러한 마음과 영성이 하늘로 향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반대로 아버지를 공경할 줄 모르는 불효는 바로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 오늘날 문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P26
비평

우리나라에서 비평이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사고로 나쁜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생각하죠.
원래 학문에 있어서는 찬미하다, 신선하다 이렇게 우리 지식을 칭찬하기 위해서 있었던 개념인데 이게 잘못 들어와서 비판하고 부정적인 사고를 해야 비평적이고 칼날 같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
우리나라의 지식은 전부 부정적인 사고입니다.
대학 나온 사람들은 전부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고분고분한 며느리가 들어오니까 재는 대학 다닌 애 같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안 배운 애들은 고분고분하고 긍정적인데 배운 사람들은 대들고 부정적이라는 거죠.- P37
세미오시스semiosis

‘노웨어nowhere= 어디에도 없다‘인데
‘나우 히어now here=지금 여기에‘ 이렇게 글자 하나만 고치면 바뀌는 거예요. 그렇게 언어나 문자라고 하는 것은 창조의 가장 쉬운 부분이에요. 사실 현실 속에서는 남이 님이 되려면 얼마나 힘들어요.
님이 남이 되려면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해요.
그런데 글자로는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님이 되잖아요.
이걸 세미오시스라고 합니다.
창조 중에서 돈 안 들고 제일 쉬운 방법이 언어 조작입니다.
이걸 독재자들이 다 썼어요.
언어 조작에 의해서 이념을 조작하는 거예요.
가령 ‘저 사람들이 세뇌됐어‘ 하면 ‘아, 무서워‘ 하지만,
‘재가 의식화 됐어‘ 그러면 박수 치는 거예요.
안 그래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참 운동할 때 의식화됐다고 했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세뇌시킨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말 하나를 네거티브negative를 붙이느냐,
포지티브 positive를 붙이느냐에 따라 (...) 바뀌는 거예요.- P39
긍정어

한국인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슬퍼 죽겠다"는 말과 함께 "좋아 죽겠다"라는 말도 씁니다.
때로 죽음은 부정이 아니라 극상의 긍정어가 되기도 합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공연을 보거나 감동적인 광경을 볼 때 한국인의 감탄사는 "죽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말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거나 최상급의 상태로 말할 때에 ‘죽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P43
문자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는 전설의 인물, 창힐의 눈은 네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눈은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정복합니다. 창일이 한자를 모두 완성하자, 어둠 속으로부터 귀신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문자가 만들어짐으로써 어둠을 지배하는 귀신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
어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잠이고 망각이고 사라지는 모습들입니다. 문자는 보는 것이고 말은 듣는 것입니다. 말은 귀신의 우는 소리처럼 어둠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말을 문자로 옮긴다는 것은 혼돈의 어둠에서 질서의 빛 세계로 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붕괴되어가는 소리의 연약함에 모양과 견고함을 주는 것, 시간에 대항하는 용기와 그 장소를 주는 것, 물건을 가리키는 손이 아니라 물건 그 자체의 흔적을 밝히는 빛, 그것이 바로 네 개의 눈에서 생겨난 아이콘 문자들입니다.- P46


소금장수의 길에서 실크로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길은 상인들이 개척해간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발생하고 그것이 널리 전파된 것도 실은 상인들이 갈고닦아 놓은- P53
그 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룸비니 Lumbini에서 갠지스Ganges 중류지역까지 석가가 걸어간 500킬로미터의 길이요 예수가 나사렛Nazareth에서 예루살렘까지횡단한 150킬로미터의 길이다. 불도佛道와 기독교의 그 길은 속세의 상도를 타고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P54
사랑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눈이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낙타란 말에는 부위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말들이 많다(세분화되어 수십 가지가 있다).
에스키모(이누이트족)인들에게는 눈에 관한 단어가 수십, 수백 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낙타란 말은 없다.
남과 북, 지리적 상황에 따라서 말은 정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남과 북이 없고 여름과 겨울이 따로 없다.
자연과 문화의 차이가 언어에 의해서 뚜렷한 경계선을 만든다.- P57
언어

언어의 속도에 반응해서 뒤쫓아가는 사람,
창조적 상상력으로 만들어가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 이렇게 세 종류가 있는데 여러분은 언어를 소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뒤쫓아가는 사람이 되지도 말고,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말하기의 핵심입니다.
뒤쫓아가지 말라는 것.- P60
그냥

우리는 "그냥"이라는 말을 참 잘 씁니다. "너 왜 왔니?" 물어도
"그냥", "너 왜 가니?" 해도 "그냥"이라고 대답합니다. (...)얼마 전 외국인들을 모아놓고 한국 문화의 특징을 말해보라니까, ‘적당히‘ ‘어바웃about‘ ‘대략‘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그것이 ‘그냥‘의 논리입니다.
우연성이나 노이즈noise야말로 우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서양은 기승결로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지만, 동양은 기승전결로 한 번의 터닝이 있은 다음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P66


뇌에 이상이 오면 전신이 마비됩니다. 그걸 불인,
아니 불자에 어질 인, 인하지 않다, 라고 해요. (...)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육체가 다른 육체를 느낄 수 있는 교감신경이 없다는 걸 의미하지요. (...)
헤어지는 인사말 ‘잘 있어‘라는 말, ‘잘가‘라고 하는 그
‘잘‘이라는 말. 영어로 웰 다잉well-dying, 웰 에이징well-aging 등우리가 흔히 잘 쓰는 ‘웰‘이라는 말, 그게 바로 잘 있어,
잘가 할 때의 ‘잘‘입니다. 그게 바로 어질 인이죠.
이게 있으면 잘 있고 잘 가게 되는 겁니다.
떠나도 그와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고, 잘 있으면 떠나간 사람을 마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잘 있어, 잘 가입니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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