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성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많은 것들이 한 인간의 삶에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것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 존재의
광대한 지도를 그리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오만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대히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1901년 리스본
페드루 바스쿠 데 알메이다 프라두
<중요한 것에 대하여>- P5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독자를 내 생각의흐름 속에 끌어들여, 명료함을 얻고자 하는 치열한 시도에 동참시키고- P17
자 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독자가 사고 자체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색의 리듬에 휩쓸려 들어왔으면 좋겠다.
"사실, 아주 새로운 것은 없었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아.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말로 정리해주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사고의 주변에 머무를 뿐 명확하고 뚜렷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도 실제로는 아주 많다는 것을 저자가 숨기지 않았다는 점도 좋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 이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목표를 이루었다고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P18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서 갖는 자화상은 현재 우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주체가 가진 능력에는 스스로를 평가 대상으로 삼고 행동과 경험이 만족할 만한 것인지, 즉 기꺼이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 내쳐야 할 것인지 자문하는 일련의 과정도 포함된다. 현재 존재하는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 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것, 되고 싶은 대로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도 주체가 가진 본질이다. 그러므로 주체로서의 인간은 내적 검열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사고, 희망,
공상을 금지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이 능력의 원천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능력이다. 주체적 인간은 내적 갈등을 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행위와 경험을 존중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자문할 줄 알아야 한다.- P25
이 중 불의의 사건 사고를 당한 경우는 굴욕이라고 할 수 없다.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우리에게 무력감을 안겨주지만 그렇다고 굴욕을 주지는 않는다. 굴욕이 주는 무력감은 장애물을 극복하거나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등 자신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않을 때 느끼는 종류의 것과는 다르다. 굴욕이 주는 무력감은 타인과 관련이 있다. 의미를 잘따져보면 굴욕에는 굴욕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굴욕을 준다.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무력감을 안겨줌으로써 굴욕이 생기는 것이다. 이때의 무력감은 우발적으로나 무계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황에 빠진 군중들에 의해 밀쳐지거나 질질 끌려간다면 그것은 무력감이지 굴욕은 아니다. 굴욕은 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의도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할 때 성립된다.- P38
이처럼 존엄성에 대한 서로 각자 상이한 경험이 충돌을 일으키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존엄성의 이유로 내가 확신하는 바를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설령 상대방의 존엄성이 깎인다고 해도 그를 대신해 행동하거나 간섭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보호함으로써 그의 존엄성을 지켜주려면 나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책임감이나 진실성이라는 차원에서의 나 자신의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미 서문에서도 언급하긴 했지만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놓고 이러한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은 존엄성과 관련된 경험, 그리고 존엄성이 속하고 그 안에서 표현되는 삶의 형태,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P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