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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IT DE L'ENFER
 전출처 : 로쟈 > <청록집>의 허와 실

최근에 <청록집> 출간 60주년을 기념하여 초판을 냈던 출판사에서 초간본 시집 그대로 재발간한 바 있다. <청록집>(을유문화사, 2006)이 그것이다(내가 예전에 갖고 있었던 건 삼중당문고판 <청록집>이었다). 마침 창비주간논평에 이시영 시인이 '<청록집>이 허와 실'이란 논평을 싣고 있다. 비록 시집은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한국시를 읽는 독자라면 출간의 의의를 마땅히 한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겠다.

창비주간논평(06. 07. 11)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6.6.)이 간행 60주년을 맞았다. 한 잡지(<현대시학>2006년 6월호)는 기획특집으로 '<청록집> 출간 60주년'을 꾸며 초간본 원본을 전재하고 네 편의 평문으로 '청록파 시 새로 읽기'를 실었다(그런데 정작 새로운 내용은 박목월의 탄생지가 경주 서면 모량리가 아니라 경남 고성이라는 전기적 사실에 대한 ‘교정’ 정도다).

-그리고 을유문화사에서는 2006년 6월 26일자로 '제2판 1쇄'를 발행하여 책의 갑년(甲年)을 기념했다. 표지에 뿔이 돋은 푸른 사슴 그림(소묘 김의환)을 그대로 재현한 이 시집은 오늘의 독자들을 위해 가로쓰기에 낱말풀이를 덧붙인 현대식 조판본을 앞에 붙이고 뒤에는 1946년의 원본을 영인(影印)해서 실었다.(*청록파 시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른 자리에서 간단히 적은 바 있는데, 대략 고종석의 평가에 준한다.)

 

 

 

 

-그러나 서둘러 나의 독후감을 얘기하자면 <청록집>에는 '자연의 발견'(김동리)이라는 그 문학사적 명성만큼 '작품으로서의 시간'을 살고 있는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다. 좀더 박하게 얘기하면 박두진에게는 '묘지송'과 '도봉', 조지훈에게는 '낙화'와 '고사(古寺) 1' '완화삼(玩花衫)', 그리고 좀 넉넉히 봐준다면 '파초우(芭蕉雨)'와 '승무'가 고작이다.

 

 

 

 

-<청록집>을 청록집답게 돌올히 빛내고 있는 시인은 단연 박목월이다. 일체의 선입견 없이 작품 자체를 접했을 때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정남영 '형상과 그 너머', <창작과비평>2003년 가을호)는 이른바 '고전'에 이른 시는 박목월에게 제일 많은데, '윤사월' '청노루' '갑사댕기' '나그네' '산이 날 에워싸고' (이 작품은 훗날 신경림의 유명한 '목계장터'의 상상적 '원본'이 된다) 등이 그것이다.

-이밖에도 (조지훈의 경우처럼) 좀 넉넉한 기준을 적용하면 '임' '삼월' '달무리' '박꽃' '길처럼' '가을 어스름' '귀밑 사마귀'(각 연의 말미가 "워어어임아 워어어임"이라는 송아지 부르는 소리로 끝나는 것이 좀 어색하지만) '산그늘'까지 포함하면 박목월의 '명품'은 그야말로 <청록집>의 대표상품인 셈이다. <청록집>은 모두 39편의 시를 싣고 있는데 그 앞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박목월의 이 '주옥같은' 작품들 때문에 이른바 인구에 회자되는 명성을 얻었다고 본다. 가령 다음과 같은 한편의 시를 보자.

잠자듯 고운 눈썹 위에
달빛이 나린다
눈이 쌓인다
옛날의 슬픈
피가 맺힌다

어느 강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눈썹 길슴한
옛 사람을

산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마다
도사리고 앉은 채
도사리고 앉은 채
울음 우는 사람
귀밑 사마귀('귀밑 사마귀'전문)

-박목월 시의 '장처(長處)'는 아무래도 한국인의 심저에 깃든 경쾌하면서도 발랄한 3음보(때로는 변형 2음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 가락에도 있지만, 시의 핵이랄까 시의 눈이랄까에 해당하는 어느 한 대목을 무심히 툭 건드리고 지나가는 듯한 그 묘사의 장기에도 있다.

-위의 시에서는 2연의 "어느 강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눈썹 길슴한/ 옛 사람을"에서 "길슴한" 같은 것이 그러한 예인데, "길쭉한"이라는 말의 이 경상도 방언은 "귀밑 사마귀"를 지닌 "옛 사람"을 단박에 드러내는(그야말로 직핍하는) 형용어이자 이 시의 '맛'을 배가시키는 결정적인 묘사어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만약 이 2연의 살가운 표현과 2음보의 연속(1행과 2행)과 3음보(3행과 4행)가 교차하면서 여울지는 듯한 세찬 가락이 없었다면 '귀밑 사마귀'는 그야말로 범작(凡作)의 운명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갑사댕기'또한 그의 시가 가락에 얼마나 능하고 우리말의 급소(急所)에 얼마나 예민한지 보여주는 수작이다.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갑사댕기' 전문)

-이 시에서도 작품의 핵은 "갑사댕기 남끝동"이고 그 "갑사댕기 남끝동"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 작품을 저 높이 들어올리고 있는 것은 4음보-3음보-4음보로 이어지다가 급박한 여울을 만난 듯 일시에 감돌아치며 끊어질 듯 흐르는 3음보-3음보의 연속된 리듬이다. 그리고 이 급박하게 숨찬 듯 끊어지는 3음보의 연속은 독자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윤사월'에서도 박목월의 이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라는 명구(名句)를 남긴다. 그리고 작품이 오랜 시간의 부식을 거슬러서 오늘에도 살아남는 희귀한 예를 실증한다.


 

 

 


-물론 박목월과 <청록집>을 마냥 찬사의 대상으로만 거론할 수 없다는 점도 잊어선 안될 것이다. 1946년은 '조선문학가동맹' 소속 시인들이 <횃불-해방기념시집>을 낸 해이기도 하고,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한국어의 능숙한 운용의 면에선 이들보다 한수 위임이 분명한) 서정주의 <귀촉도(歸蜀途)>가 간행된 해이기도 하며 바로 이듬해에는 이용악의 <오랑캐꽃>과 오장환의 <나 사는 곳>이 간행됐다.(이혜원 '근원의 지향과 모국어의 복원', <현대시학> 2006년 6월호)

-해방공간의 정국에서 새로운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소명 앞에 너무나 초연한 듯한 이 3가시(三家詩)의 '자연의 발견'은 또다른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한데, 이들 3인이 모두 당시 김동리, 조연현이 주도하는 우익 진영의 '청년문학가협회' 회원이었다는 점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년을 맞은 <청록집>을 다시 읽는 기쁨은 크다. 우리 시도 이제 이만큼 성숙해서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아는 어른스런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3가시 중에서도 박목월은 훗날 생활의 세계로 귀환하여 '하관' '가정' '기계 장날' '이별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낳는다.

06. 07. 11.

P.S. 대부분이 중고등학교의 국어/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편들이라  친숙하지만 마지막에 언급된 시들 가운데 '가정' 같은 경우는 시에 배어있는 따뜻한 정감으로 언제나 눈웃음짓게 하는 시이다.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되어 읽을 때는 이게 꼭 웃을 일인가 싶지만...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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