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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김혜순 시인이 쓴, ‘여성’으로서 경험한 아시아
여행 산문집이다. 우선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행기였다고 총평하고 싶다.
티베트와 인도,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몽골 등의 생경한 여행지의 낯섦이 반가웠고, 아름다운 문체 속에 에로스의 철학이 놀라우리만치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점도 굉장했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기대가 된다.
“이것은 내 ‘여행하기’의 기록이다. 또한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의 기록이다.” (p.10)
처음 책 발간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제목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제목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들뢰즈 철학의 ‘되기’ 개념이었다. 제목의 여자, 짐승, 아시아는
모두 비(非)남성, 비(非)인간, 비(非)서양권이라는 타자성을 지닌 소수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들뢰즈의 ‘되기’는 ‘주체에 의해 규정되는 타자’의 구조를 뒤엎고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가치척도 속에서의 구분을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인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스러움”을 수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개념을 김혜순 시인이 일상적인 언어로 굉장히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여자하기는 일종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여자의 몸으로 겪는 복수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이다. 몸의
경험을 사유하기이다.” (p.18)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내어주는 다른 주파수의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그 세상에서 서로의 삶을 변용해간다. 그리하여 짐승하기는 분열하기이다.” (p.19)
서구 근대를 거친 역사 속에서 합리적인 이성에 대척하는 감성은 멸시받아 왔으며,
이는 그것의 모체인 가변적이고 유한한 육체의 상징인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났다. 근대를
연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성을 말하며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한 인간 이외의 것은 모두 물질적인 연장성만을 지닌다고 했다. 즉, 동물과 같은 비(非)인간종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타자화 한 것이다. 아시아 또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타자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나의 존재가 아닌 뭉뚱그려진 ‘무엇’으로 규정되며 사라지는 존재성에 대해 김혜순 시인은 아래처럼
말한다.
“나는 왜 나가 아니고, 우리인가. 은유들 속에는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가. / 네가 나를 쥐라고 부르면, 나는 쥐가 되는가. 그러나 너는 쥐의 번식을 감당해본 적이 있는가. (중략) 네가 나를 여자로 부르자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너는 사라져가는 나의 뒷모습들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한
여자의 수만 가지 분열을 견뎌본 적이 있는가. (중략) 너는
너를 얼마나 잘 가꾸었기에 온전히 ‘나’인가.” (pp.67-68)
“누구든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쥐 두마리가 생산한 세상의 모든 쥐
중에서, 몇 마리를 실험실에 가두어놓고, 그 쥐에 대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p.70)
이뿐 아니라 76~77페이지의 “검은
여신”이라는 어머니 묘사는 윤지선 교수의 논문 『장기-몸의 봉기로서의
출산』에서 말하는 모성의 신적 폭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텍스트 안에 방대한 철학적 아이디어들이 담겨있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철학에 대한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해서 이 정도로 마쳐야겠다. 이게 철학서적은 아닌 것 같으니깐… 그럼 이제 개인적으로 취향이었던
부분을 말해보자면, 「붉은 자두」편과 「낙타하다」에서 사막을 묘사하는 대목이 좋았다.
“늦은 여름의 햇빛이 이토록 향기 나게 쫀득거리는 것을 만들어내다니. 향기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향기의 발음기호 속엔 이 질감이 없다.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은 필요 없다.” (p.158)
“평면이다. 주체도 없고, 형식도 없다. 모래 입자들의 운동과 정지가 있을 뿐. 지층도 없고, 칸막이도 없다. 성층
작용도 없다. 다만 무한한 운동과 무한한 정지, 다시 무한한
운동. 빠름이 있고, 느림이 있다. 그리고 열띤 분자들이 있다.” (p.169)
철학적인 의미를 넘어 아름다운 여행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김혜순
시인의 시선으로 경험한 순간들을 풀어냈겠지만, 그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라는 여행을 택한 만큼 각 장소와 순간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혜순 시인은 그 발현을 사려깊은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통해 옮긴 것일 테다. 그의 다른 시집을 꼭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