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 사랑님의 서재
  •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 이재영
  • 9,900원 (10%550)
  • 2018-07-15
  • : 159

이 책은 설교집이다. 탁월한 논리와 명쾌한 논증 그리고 적합한 적용이 돋보이는 설교다. 이 책을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듯하다. 설교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특징이 있다. 청중에게 들려지는 아주 감동을 주는 설교다. 차세대 설교자로 각광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설교자다.

이 책은 3부로 되어져 있다. 1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라’. 2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라’. 3부, ‘하나님의 관점으로 시작하라’로 되어 있다.

  

동역은 나와 우리를 만듭니다.

 

전4:9-12절

 

나, 너, 우리, 대한민국

 

퀴즈를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1.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는? 정답: 나

2.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는? 정답: 우리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는? 정답: 사랑해

4.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는? 정답: 내 탓이오

5. 돈 안 드는 최고 동력 다섯 글자? 정답: 정말 잘했어

6.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는? 정답: 우리 함께 해요

7.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는? 정답: 처음 그 마음으로

8.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는? 정답: 그럼에도 불구하고

9. 다시 한 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는? 정답: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10.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열 글자는? 정답: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국어 책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나, 너, 우리,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다닐 때는 솔직히 이 단어를 왜 처음으로 쓰고 배워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속에는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단어들은 분명히 글자를 습득하는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단어들을 배우면서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도 중요하고 ‘너’도 중요하니까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리’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 우리 성도들.... 왠지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힘이 생기고 소속감이 생기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집단이기주의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1인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라는 말이 점점 실종되고 있는 듯합니다.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밥’은 혼자 밥 는 것이고 ‘혼술’은 혼자 술 먹는 것입니다. ‘1코노미’라는 말도 있습니다. ‘1코노미’는 아라비아 숫자 1과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의 합성어입니다. ‘1코노미’는 혼자만의 소비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각자가 스스로 제 살길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외에 ‘나로서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로서기’는 ‘나로서’와 ‘홀로서기’를 합친 말입니다. ‘나로서기’는 곧 외부의 치유에 기대지 않고 자존감의 원천을 나에게서 찾으면서 나로서 홀로서려는 20대를 설명하는 신조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1인가구가 계속해서 늘어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부분들을 굉장히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에 맞는 신조어들이 계속 등장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홀로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혼자서 무슨 일이든지 잘할 수 있어야 하고 혼자만이 가져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혼자서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인간은 서로 도우며 사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 아담을 홀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 암수 짝으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인간은 남자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이 안 좋다고 하셨지만 동물은 암수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을 홀로 만드신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담이 자신에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필요성을 느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고 가십니다. 아담은 아름다운 하와를 보면서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아담을 돕는 배필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속에는 아담 역시도 하와를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부부는 서로 돕고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만 서로 돕고 살고 부모나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은 서로 안 돕고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가운데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드시고 사회라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드신 것은 서로 도우며 살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로‘나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으실 수 있습니다. “목사님!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분도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그분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분보다 덜한 병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분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좌절하고 절망하다가도 그분을 통해서 그래도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가 동역의 관계입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가 바로 동역의 관계입니다. 부부는 동역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동역의 관계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도 다 동역의 관계입니다. 한 여성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앞에 서는 것을 보고 아무런 생각 없이 탔습니다. 그런데 뒷 자석에 앉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조수석에 어떤 중년여성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택시를 잘못 탔나 생각하며 당황하고 있는데 조수석 뒤편에 붙어있는 글귀를 보았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알츠하이머(치매)를 앓고 있는 제 아내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기사님은 치매에 걸린 아픈 아내를 혼자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조수석에 태우고 일을 했던 것입니다.

택시에 탄 여성은 그제 서야 안심을 하였고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이 부부가 대화하는 것을 통해 부부란 무엇인지 가족이란 무엇인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점령 하에 있던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독일군이 들이닥쳐 유대인을 잡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불행한 생각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이 마을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독일군 일부는 마을로 진입했고, 또 일부는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독일군은 학생 들 가운데 드문드문 섞여 있는 유대인 아이들을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코르자크 선생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코르자크 선생님은 자신 앞으로 몰려온 유대인 아이들을 두 팔로 모두 꼭 안아주었습니다. 독일군에게 아이들을 왜 데려가느냐고 반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살기 가득한 짐승이 된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태울 트럭이 학교로 진입하자 아이들은 더욱 안타깝게 매달렸습니다.

독일군은 코르자크 선생님 곁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군인을 막아섰습니다. “가만두시오. 나도 함께 가겠소.” 또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랑 같이 가자. 선생님이 같이 가면 무섭지 않지?” 코르자크 선생님은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습니다. 독일군이 선생님을 끌어내리려고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어찌 사랑하는 아이들만 보낼 수 있단 말이오. 같이 가게 해주시오.” 그렇게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한 명 한 명 눈빛으로 안심시키며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히틀러에게 학살된 동포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념관 뜰에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제자들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있는 코르자크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치매가 걸린 아내를 택시에 태워 일하는 기사아저씨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유대인도 아니면서 유대인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가스실로 함께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 코르자크 선생님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들의 동역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런 동역들을 보면서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맛 사는 세상이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동역하면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도 동역의 중요성을 언급해 놓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왕이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보고 말년에 쓴 책입니다. 솔로몬은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어쩌면 혼자 잘난 맛에 살아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혼자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솔로몬은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둘이 함께 할 때, 하나가 넘어져도 다른 한 사람이 일으켜 줄 수 있지만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혼자 눕는 것보다 둘이 누우면 따뜻하고 혼자서 적과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한마디로 동역함의 힘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역의 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정말 동역하면서 사십시오. 나의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십니다. 남을 먼저 이해하려고 해보십시오. 그럴 때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더 많은 일, 더 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동역하는 것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과 훌이 동역 하는 것을 보십시오. 아말렉족속과 이스라엘백성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게임이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말렉족속은 전쟁에 능한 민족이었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만 했지 전쟁을 해 본적이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말렉족속이 걸어온 전쟁이라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여호수아와 모세의 역할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말렉족속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모세는 전쟁터로 나간 것이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은 이겼지만 힘이 빠져 내려오면 졌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 다가 지친 모세를 그 곳에 앉히고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한 사람은 오른손을, 또 다른 한 사람은 왼손을 꼭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은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으므로 이스라엘백성이 승리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모세 한사람으로 인해 얻은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지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옆에서 동역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곧 이 전쟁의 승리는 네 사람과 이스라엘백성들의 동역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동역하여 힘을 합치면 엄청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역을 나를 나 되게 합니다

 

동역하면 우리가 되고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역이 나를 나 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요? 2013-14 시즌 미국 NBA의 MVP는 케빈 듀란트였습니다. 케빈 듀란트는 MVP 수상연설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팀에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 후에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너희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나쁜 날들도 있고 가끔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하지 못할 때도 있어. 내가 그것을 이겨나가기 위해 다시 노력할 때 너희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해주었어. 정말 고마워. 난 항상 최고의 리더도 아니고 항상 최고의 선수도 아니며 항상 최고의 경기를 할 수가 없는데 너희들이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어. 정말 고마워” 동료들에게 뿐만 아니라 케빈 듀란트는 어려운 삶 가운데 자신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해주시고 자신 스스로를 믿게 해준 어머니가 진정한 MVP라고 말했습니다.

케빈 듀란트는 자신이 MVP가 될 수 있었던 것, 케빈 듀란트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먼저는 주님의 은혜요. 그 다음은 어머니를 비롯한 자신들을 도와준 동료들이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케빈 듀란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어머니의 희생과 동료들의 동역이 없었다면 케빈 듀란트라는 존재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동역이 있었기에 케빈 듀란트라는 존재가 있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통해서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 지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역을 통해 가장 나답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동역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과 동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우리가 동역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피조물과 창조주가 동역을 한다는 것은 어패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면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역자라고 여겨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

 

하나님은 신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혼자서 일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의 파트너로 부르셔서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선교를 위해 바울과 동역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선교사들과 동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만드시기 위해 목사와 성도들과 동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은 사람과 동역하는 것과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과 동역할 때는 쌍방 간에 조율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 맞추어 드리면 됩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동역은 조율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우면서 동역의 관계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동역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가 마음이 맞고 필요를 느끼면 동역은 쉽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이 맞지 않고 서로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동역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에 함께 있게 하셨다면 서로 돕고 조율하면서 동역해야 합니다. 그렇게 동역을 할 때 가장 나답게 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생겨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