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될 때, 폴 칼라니티
죽음의 문턱 앞에 섰던 사람을 안다.
수술실에 일곱 번이나 들어갔던 사람.
엄마다.
나는 그 중 네 번을 함께 있었다.
아니지.
수술실 밖에서 네 번 기다렸다.
조마조마하면서.
때로는 반성하고, 때로는 울면서.
환자의 이름이 기역에서부터 나오는 화면에
반복되는 글씨 속에서 내가 아는 이름을 좇았다.
꽤 오랜 시간을 ‘수술중’을 달고 있다가 ‘회복중’으로 바뀌었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회복에 심장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비로소 이송중으로 바뀐다.
중환자실의 짧은 면회 시간.
딸기 우유가 마시고 싶다는 말에 지하 편의점까지 내달리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완전한 효녀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가 엄마를 가장 사무치게 그리워한 때는 아니다.
중학교 무렵이었나.
양치질을 하다가 갑자기 문득,
버스를 타고 오던 엄마가 사고가 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을 때.
나는 하얀 거품을 뱉어가며 엉엉 울었다.
멀쩡한 버스가 사고 나는 일보다야 수술실을 들어가는 일이 위험한 것은 당연지사였겠으나
마음의 준비 문제에서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그리움은 급작스러움을 발판 삼아 무작정 내게 달려들었다.
서른여섯, 젊은 의사 폴에게도 죽음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인간에 대한 고뇌를 위해 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을 공부하다, 의학을 공부하다,
그의 삶 대부분을 학문으로 보내다 비로소 공부가 끝나고 교수직을 준비할 무렵
“열심히 했어. 이제 그만 하고 쉬어도 돼.”
느닷없이 공부로부터의 해방이 노크를 한 것이다.
교수직 대신에 암이라는 아이가.
그가 생명의 끈을 붙잡고 다시 환자의 앞에 서는 동안
그에게 좌절과 고통과 사랑과 그리고 딸아이가 찾아왔다.
자신이 지켜냈던 수많은 생명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가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러나 그가 힘든 상황에서도 의지로 써내려간 이 글들 덕분에
나의 오늘을 행복으로 여기며 조금 더 가치 있는 날로 채울 수 있게 되니
그는 분명한 명의다.
잠시 눈을 감고 그에게 말을 건다.
세상이 참 우습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산 당신이 조금 더 옆에 있었으면 우리의 삶이 더 좋아지지 않았겠느냐고.
그러나 아쉬워 말라고.
당신의 숨결이 바람이 되었을 때
그 바람이 여기 먼 곳 내게도 불어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고.
때때로,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잘 한 일 중에는
분명 당신의 몫이 있을 것이라고.
문득 당신이 떠오를 때
나는 환자의 눈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반복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고맙다고, 참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