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누군가의 책을 읽다가 읽기희망도서 목록에 올려두었던 것인데 만화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독후감을 쓰려고 자료를 조사하다가 박미향의 <도쿄 모던 산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사실은 강상중교수의 <도쿄 산책자>의 독후감을 찾아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구스미 마사유키의 만화 <우연한 산보>의 내용이 <도쿄 산책자>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구회사에 근무하는 중견 영업사원 우에노하라가 근무 중에, 또는 휴일에 나갔던 산보에서 발견한 일상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았습니다. 쿠스미 마사유키가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가 만화를 그렸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만화 <고독한 미식가>를 그려냈다고 합니다. <고독한 산책가>에서처럼 우연히 나선 산책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만화를 그려낸다는 기본적인 틀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연한 산보>에는 모두 8개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이어서 글을 쓴 쿠스미 마사유키가 후기를 대신하여 산책 원작 작업을 진행해온 과정을 사진과 함께 설명했습니다. 만화를 쓰고 그리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마사유키는 <우연한 산보>의 만화작업을 시작하면서 1. 조사하지 않는다, 2. 옆길로 샌다, 3.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등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주인공의 산책이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책 원작 작업’에 이어 <우연한 산보>에서 다룬 8가지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거나 실제 인물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목 그대로 우연한 산책이다 보니 산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1화 ‘에디슨의 전구’에서는 스산할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에서 쇼와 시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골목에는 예전에 살 뻔한 집도 있었습니다.
2화 ‘시나가와의 셋타’에서는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나 할까(22쪽)”라는 대목을 발견합니다. 일상적인 ‘산책’이라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나 교토에 있는 철학자의 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우연한 산책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시가가와에서도 거리풍경이 지방같다는 느낌을 받고, “옛날엔 이 길을 상투 틀고 짚신 끌고 다녔던 거지. 관서지방처럼 번성하기를 꿈꾸면서. 그게 불관 100년 전이라니 참 신기해.(23쪽)”라고 말합니다. 주인공은 시나가와의 신발가게에서 세타를 사고 목욕도 하지만 정작 찾아간 가게는 폐점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 걸린 다리에 선 주인공은 “우리는 50년 뒤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27쪽)”라고 말합니다.
7화 ‘하모니카 요코쵸’에서는 이 만화를 그리기 전에 정한 원칙이 이야기됩니다. “이런 골목길은 가이드북 같은 것에 의지하지 말고 그냥 걷는게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조금 불안할 정도가 재미있는 것 아닌가요? 걷다보면 반드시 재미있는 가게나 물건이 나오는,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골목이거든요. 그리고 산책은 관광과는 다르죠.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 데서 오는 기쁨이거든요.(76쪽)”
마지막 8화 ‘메지로의 카키모치’에서는 해외에서 구매 상담을 온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외국인은 카와카미 소쿤이 일본어 교과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가공의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암투병기 <죽고 싶지 않아!>였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 산책이었다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와서 신기했습니다. 어쩌면 병환이 위중하여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요?
그 외국인 구매자를 숙소에 바래다주고는 우연히 종업원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이상한 거리로 나섰는데,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동네 가게들이 이어지는 곳에서 카키모치를 사기도 하고,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칭칭’과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오망코’에서 한글자씩 따온 칭망(珍萬)이라는 식당에서 쇼유라멘을 사먹기도 합니다. <고독한 미식가>의 흔적을 담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연한 산보>를 우연히 읽고 귀중한 생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