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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에게는 뭐랄까,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보니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내가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 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P58
더도 덜도 아닌 액수는 얼마인지, 적절한 교환은 무엇일까 고민하느라 뒤척였다. 하루이틀 묵고 가는 손님이면 무시했겠지. 그런데 우리 부부가 한 달 가까이 머문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도 갑갑했던 거야. 외국인 자주 접하며 팁에 익숙해졌을 테고. 그러다보면 못 받을 때 서운한 게 또 사람 마음이고. 그 사람 생활에 팁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지도 몰라.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려 애썼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에선 왜 자꾸 차가운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 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 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P67
시내에는 원주민보다 관광객이 많았고 한국인도 자주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인과 마주칠 때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시치미와 드러냄, 감춤과 판별의 눈빛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가끔은 그들이 여행지의 마법을 깨뜨리는 듯해 언짢다가도 또 어느 땐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 귀에 너무 잘 박히는 한국어가 신기해 고개 돌렸다.- P69
미색 종이에 검은색 펜으로 휴대전화에 뜬 말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실은 적는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중간에 글씨를 자꾸 틀려 만족할 만한 모양이 나올 때까지 종이를 몇 차례 구겼다. 그러자 새삼 이 나라 사람들, 이걸로 수백 년간 뭔가 읽고, 쓰고, 기록했겠구나, 거기 내가 모르는 삶도 많이 담겨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P81
메시지를 보내기 전 미안하단 말을 지울까 고민하다 그대로 놔뒀다. 그러곤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엄마가 여러 번 고치고 또 새로 썼을 문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뿌듯하기보다 복잡한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돈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실직중이라는 것과 엄마의 외동딸이란 사실에 압박을 받아서만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여러 번 들은, 눈 깜짝할 사이 폭삭 늙어버린 엄마가 내게 보낸 ‘고맙다‘는 문자를 보자, 이상하게 그 말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상대에게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P85
백번 양보해서 사람이 탐욕스러울 수도, 불성실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부도덕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욕먹는 거 아니야. 정작 편견은 누가 양산하는데?- P88
나는 대형 쓰레기통과 음식물 쓰레기통, 재활용품 수거함이 한데 모인 어둑한 장소로 걸어가며 두 달 전 집주인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만일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일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전염병이 아니었다면, 그사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고, 노동 가치니 화폐가치니 하는 것들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 윗집 부부처럼 밝은 얼굴로 이웃을 환대할 수 있었을까? 하고.- P105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데, 나조차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공간을 침범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자 지난 시간 우리가 겪은 과정이, 그 모든 노출과 공개가 부당하고 지리멸렬하게 느껴졌다. 대여 혹은 매매 의사만 있으면 누구든 실거주자 집에 들어와 모든 걸 살펴볼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우리가 사회 초년생도 신혼부부도 아닌, ‘성장‘과 ‘단계‘를 조금이나마 맛본, 이제 중년에 접어든 부부라 그런지 몰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시대인과 어떤 가치와 속도를 공유한다 믿은, 그런데 그게 틀렸다는 걸 막 깨달은 사십 대라서. 그래서였을까? 친구라도 초대한 양 온종일 집을 쓸고 닦았으면서 막상 그들 부부가 떠났을 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P108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 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P130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P141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P141
‘이참에 나도 프로필 사진이나 바꿔볼까?‘ 고민하며 기태는 사각 창 하단의 검색 단추를 눌렀다. 이윽고 무작위로 선정된, 기태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삶이 영롱한 비즈로 만든 발처럼 순식간에 펼쳐졌다. 세계 다양한 인종과 총천연색 시공이 위화감 없이 섞였다. 북극의 오로라, 열대의 낙조, 도시의 마천루, 얼룩 없는 창, 전선 없는 방, 보풀 없는 옷, 질병 없는 신체, 그림 같은 요리가 줄지어 늘어섰다. 마치 누군가 꾼 가장 좋은 꿈을 한데 모아둔 느낌이었다.- P147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다. 과한 자기 연민이나 엄살이 없는, 깨끗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 오랫동안 유지해온 ‘적절함‘의 거리를 둘이 힘을 합쳐 구겨 버렸다. 스무 살의 다급함이나 허둥거림 없이, 과도한 기대나 실망도 없이 서로의 느낌에 집중하면서. 그러고 한참 뒤 입술을 떼었을 때, 기태가 갑자기 벚나무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기태씨, 왜 그래요?
희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태는 문득 발길질을 멈췄다. 그러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얼굴로 희주를 빤히 바라보다 누가 들어도 너무 순진하고 무모해 낯뜨거워지는 말을 했다.
—자기 꽃비 맞으라고요.- P152
"살맛난다 할 때 그 살맛이 이 살맛이구나" 장난치며 서로의 목이나 손등을 깨물고, 상대의 속눈썹과 귓바퀴, 몸냄새에 대한 칭찬을 남발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땐 육체의 쇠락을 과장하며 서로를 늙은 배우자인 양 놀리고, 그러면 마치 노년의 남루와 공포가 줄기라도 할 것처럼 농담과 연민을 미리 당겨쓰고, 세상 무심하고 친밀하게 등과 두피에 난 여드름을 짜주고, 상처와 비밀을 나누고, 말을 아끼고, 오래 안고, 우리가 식물과 달리 똥도 싸고, 아름답지도 않고, 울기도 하는 존재임을 가여워하고 수긍해주는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P153
그날 낯선 지역의 어두운 버스 안에서 두 다리를 모은 채 분홍색 보따리를 품에 품었던 날을 생각하면, 꾸벅 조는 자신과 함께 병 속에서 출렁였을 술을 떠올릴 때면 기태는 지금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날 자신이 소중히 옮겨온 게 술이 아닌 다른 물질이라도 되는 것마냥.- P154
기태는 지난 일들이 제 속에서 커튼처럼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평소보다 더 높고 둥근 모양으로 펄럭였다. 그러자 수명이 다한 행성처럼 천천히 멀어지던 둘의 관계가 눈앞에 떠올랐다. 둘 중 누구도 그걸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렇다고 기태에게 아직 희주를 향한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다. 한때 가까웠으나 ‘이별의 형식‘ 없이 헤어진 친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 친구의 삶을 질시하지도 폄하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기태는 희주의 삶을 응원했다.- P155
만일 기태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이 남았다면 그건 희주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한 시절들 때문이었다. 맑은 몸과 마음으로 서로에게 집중했던 때. 몸의 불편을 몰라 몸을 잊고 몸에 몰두했던 때, 몸과 마음의 욕구가 거의 일치했던 때. 그런데 그 상대가 서로라서 더 좋았던 때 덕분에. 오늘밤 그 시절이 하나도 그립지 않고 또 조금은 그리워 기태는 화면 조정 시간에 홀로 지지직거리는 티브이처럼 작게 몸을 떨다 눈을 감았다.- P155
사다리 마지막 칸에 기적적으로 오른 자신과 달리 ‘요즘‘ 입사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한국의 정교한 계급 필터를 거친 이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자신이 쥐고 태어난 걸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계급성은 지우고 나이라는 약자성만 내세운 채 신문에서 읽은 말로 앞 세대에게 자주 적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뭘 굳이 읽지 않고도 언제든 쉽게 품을 수 있는 게 적의이기도 했다. […]
—제가 주제넘게 껴들어 죄송한데요. 저희 부모님은 지금도 시골에서 농사지으시거든요. 저도 장학금 받고 학교 다녔고. 중요한 건 과장님이 말씀하신 그 ‘부모‘를 둔 친구들도, 그렇지 않은 청년들도 다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 데 있는 것 같아요.- P158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기태는 ‘아! 앞으로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중받는 은따, 대우받는 꼰대가 되겠구나‘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날 기태를 괴롭힌 건 자신이 실언했단 사실이 아니었다. 기태가 진정 후회하는 건 그 순간 자신이 굳이 ‘진심‘을 말했다는 거였다. […]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P160
—자기야, 근데 나이드니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얇아져서 쉽게 찢어지더라.- P163
화면 아래 돋보기 모양 단추를 누르자 이번에도 기태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인생 한 조각, 일상 수십 조각이 주르르 펼쳐졌다. 오래된 돌길 위로 맑은 파랑이 아름답게 깔린 이국의 도시며 신선한 맥주 거품, 창과 바람, 건치 애인의 미소, 키 큰 식물의 그림자가 줄줄 이어졌다. 몇몇 순간은 진심으로 아름다워 기태에게 문득 삶에 대한 애정이랄까 감사함을 상기시켜주기조차 했다. 그러나 기태는 그게 자기 것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수천 픽셀 위를 단숨에 미끄러지는 손끝 감각이 대책 없이 편안해 기태는 남의 삶을 자꾸 넋 놓고 바라봤다.- P166
기태는 평소 자신을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성인이라 여겼다. 그래서 SNS에 드러난 타인의 모습에 별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웹에 떠도는 조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마음도 없었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주 깨달아서였다. 사회 초년생 때 임원들의 내공을 얕봤다 경악하거나 감탄하거나 후회한 일이 많았던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기태는 평소 판관을 자처하는 이들을 내심 혐오해왔다. 그런데도 기태는 차대표의 사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눈빛이 아주 라스푸틴 같네.-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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