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참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때로는 용기라는 것이 나약함의 이면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P15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P17
고장 난 시계 속 톱니바퀴를 급하게 고치려다 보면 대개 시계 전체를 망가 뜨리는 법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P19
온실 속에서 자라는 꽃이 더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자라는 망상도 그러했다. 망상은 불을 뿜어내는 덩굴식물이 되어 축축한 바닥에서 솟아올라 내 목을 졸랐고, 열에 들뜬 머릿속에서는 터무니없는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꿈속에서나 있음직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P39
에디트의 잔인한 퇴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심장이 조여왔다. 그녀가 어째서 남의 도움을 받거나 휠체어를 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에디트는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불구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절망감에서 나온 은밀한 복수심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하느님을 책망하는 대신에 건강한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잔인하고도 도전적인 행동을 통해서 나는 에디트가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P54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 역시 불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웃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매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병원, 채석장, 탄광 등지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공장, 관청, 교도소에서는 매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사역에 동원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쓸데없이 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결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비참함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괴로움에 잠도 못 이루고 입가의 웃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결코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상상 속의 고통이 아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함께 나눈 고통만이 진정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P60
남을 도와주고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만으로도 나는 흥분되었다. 흥겨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도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70
마음껏 수다를 떨고 농담을 하면서 나는 일종의 구속이라는 형식은 영혼이 갖는 본래의 힘을 제약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진정한 도량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71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자유로운 사람과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란 힘든 법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늘 보호를 받기만 하는 환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 그녀에게는 때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만 했다.- P74
인간에 대해 한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 고통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마법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고통도, 심지어는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75
새로운 것을 깨우칠 때마다 황홀해지고, 어떤 감정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청춘이다. 남을 동정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내 피를 더 따뜻하고 더 빨갛고 더 빠르고 더 격렬하게 만들어주는 독소가 혈액 속으로 침투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마치 잿빛 어스름 속을 거닐듯 무미건조하게 어슬렁거리며 살아왔던 생활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수백 가지 일들이 나를 자극하고 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남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이 깨어난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나를 열광시켰고 격동시켰다. 온 세상이 거리마다. 방마다 운명으로 가득 차 있고, 밑바닥까지 어려운 일들로 넘쳐흐르는 덕분에 나의 하루하루는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P76
가엾은 소녀가 겪는 무력함이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모든 잔인함을 증오하는 마음이, 모든 무력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운명이 나의 눈에 연민이라는 뜨거운 눈물을 주입한 후부터 나는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수많은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들 하나하나가 나를 긴장시키고 격동시켰다.- P77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을 통해서 내 안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열정을 발산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 돕자! 다시는 나태하고 무심한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돼! 나를 희생하면 나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고, 남의 운명을 이해하고 남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하며, 내가 뜻하지 않게 상처를 줬지만 자신의 고통을 통해 연민이라는 마법을 내게 가르쳐준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P77
황금빛 옷깃을 단 고급장교들은 하급장교가 그런 식으로 우쭐대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본능은 두 개의 세계, 즉 구속받지 않고 사치에 익숙해진 자유인으로서의 화려한 세계와 한 달이 31일이 아닌 30일인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더는 가난하고 불쌍한 직업군인의 세계를 가능한 한 떨어뜨려놓고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하나의 나는 또 다른 나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진짜 토니 호프밀러가 누구인지,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나인지 케케스팔바 저택에 있는 나인지, 부대 밖의 나인지 부대 안의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P79
그러나 마음의 평형상태가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스스로를 다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법이다. 나는 요치와 페렌츠가 놀라고 감탄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동안 가볍고 편안했던 마음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나는 오로지 연민 때문에 그 저택을 드나든 것인가? 허영심이나 즐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P87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관심은 전기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남의 운명에 관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