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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금지된 일‘이라는 담배 가게 주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P12
어쨌든 마흔셋이나 됐는데 일기 한번 쓰겠다고 매번 유치한 술수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어떻게 하든 미켈레와 아이 들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고 내가 원할 때 방에 들어가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다. 이런 식으로 몰래 일기를 쓰면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정작 일기 내용은 하나도 숨길 것이 없는데 말이다.- P18
불편한 마음으로 전혀 다른 미렐라의 두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생각하다, 문득 딸이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애가 집에서 맡은 역할과 밖에서 맡은 역할 자체가 다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 중 까탈스러운 쪽이 가족에게 배당된 것뿐이다.- P25
새벽 두 시다. 일기를 쓰려고 일부러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 일기장 때문이다. 전에는 집에서 일어난 일을 곧바로 잊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P32
나는 내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가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공범자로서의 친밀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P33
이제는 부모님이 몸소 보여주셨던 삶의 모델, 우리에게 자연스런 영감을 주고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삶의 모델이 항상 명확하고 흔들림 없이 확고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통, 가족, 행동 지침 등 과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가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돈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에도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과거의 신념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남편에게 언제부턴가 미렐라와 리카르도가 우리를 못 미더워하게 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의구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P34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P37
나의 사랑스러운 펠트 모자는 친구들이 쓴 화려한 색상의 새틴 모자 앞에서 초라해 보였다. 예닐곱 명 남짓한 친한 친구 모임인데도 다들 중요한 예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온갖 장신구를 걸친 채 제일 화려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친구들의 옷차림과 쨍쨍하고 날카로운 불안한 목소리에서 자신의 행복과 부와 행운을 증명하려는, 한마디로 자신들의 삶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내 장난감이 제일 멋지다고 서로 우기면서 선물받은 장난감을 자랑하던 학창 시절처럼 실은 그들조차 그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닐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잔혹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P41
"아이들 양육비와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오롯이 남편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잘못한 거야. 돈은 남편이 벌어야지. 네가 버는 돈은 비상금으로나 쓰고"
어쩌면 어머니 말이 옳을 수도 있다. 미켈레도 내심 그렇게 하는 편을 더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와 에우게네이 언덕에 별장이 있고 밤마다 할아버지가 이웃 친구들과 체스 게임을 하는 동안 난로 옆에 앉아 뜨개질하시던 할머니의 삶을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미켈레와 아이들과 나의 삶을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해묵은 종교화 인쇄물처럼 바라보곤 한다. 그럴 때면 세상 모두에게서, 심지어는 어머니로부터도 떨어진 채 오직 이 일기장과 나만 홀로 남은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P48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P51
어찌 되었든 평생 친구로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살다보면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어떤 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이는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가는 길이 달라지면 만나기도 힘들고 공통점도 없어진다.- P55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P71
어쩌면 나처럼 아이들을 다 키워놓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려면 부모에게 자신을 투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과 아이들의 안부를 전하고, 모두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진정 깊은 고독의 심연으로 빠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77
나도 내 성격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투명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나 때문에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의 나로 돌아가려면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 곁에 있으면 나다운 균형감을 되찾지만,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넋이 나간 듯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집 밖에서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매일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명랑하게 웃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제대로 웃어보고 싶다. 어쩌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강장제라도 마셔야겠다.- P92
가뜩이나 미렐라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는데, 대체 무슨 마음으로 슬립을 산 건지 모르겠다. 토요일에 할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홀로 일기를 쓰다 보니 알 것도 같다. 일기장의 새하얀 백지는 나를 매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혼자 거리를 거닐 때처럼 말이다.- P95
솔직히 말하자면, 스무 살 때 나는 미렐라와 전혀 달랐던 것 같았다. 나는 그애처럼 내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과는 달랐던 사회적 관습 때문이 아니라, 나의 내밀한 상태 때문이었다. 스무 살 때 내겐 이미 미켈레와 아이들이 있었다. 미켈레를 만나기 전부터,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은 내 소명이기 이전에 내 운명이었다. 나는 그저 내 운명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보니 미렐라가 불안한 이유는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선택권은 부모와 자식 관계, 남녀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P107
언제나 현실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는 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괴로웠다. 내가 윤리적인 문제나, 종교 문제, 정치 문제를 생각하는 중이었다고 대답하면, 아마도 다들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내게도 일기를 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날 밤에 그랬듯 애정 어린 조소를 터뜨릴 것이다. 하지만 깊은 사유 없이 어떻게 올바른 기준에 맞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P109
남편은 마흔아홉 살이다. 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는 절대로 장바구니 따위를 들 고 돌아다니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에 리카르도는 그런 일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끔 흔쾌히 나서서 나를 도와주기도 하고, 부엌에서 일하고 있으면 다가와 말동무를 해준다. 모자 간에는 모녀간보다 더 큰 신뢰 관계가 형성되는 법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 반대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성별이 달라 절대적인 친숙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의 존재가 덜 부담스럽게 느껴져 서로에게 더 솔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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