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지하를 벗어나면서 차창 밖으로 산뜻하고 싱그러운 교외 풍경이 펼쳐졌다. 그들은 묵묵히 맞은편 차창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열차가 달리면서 내는 규칙적인 소음과 진동을 느끼며 베르타는 아련한 그리움에 잠겼다. 기차를 타고 이렇게 어디론가 멀리 가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르타가 문득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어, 얼마 전에요, 하고 돌아보았을 때 마리아는 고개를 약간 늘어뜨린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베르타가 잠시 기다렸지만 마리아는 반응이 없었다. 베르타는 마리아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아이를 재운 엄마처럼 푸근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맞은편 창밖을 마음껏 구경하기 시작했다. 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만족감에 어깨가 움칠거릴 만큼 기뻤다.- P104
무엇에 홀린 듯 태극기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는데 그건 어쩌면 열아홉 살의 마리아가 미지의 나라인 독일로 출발하는 순간에 보았던, 태극기가 무수히 펄럭이던 장면의 뒤늦은 효과인지도 몰랐다. 현란한 태극 무늬와 검은 괘의 점선들은 그 당시 마리아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희열과 공포를 그대로 찍어 인화해놓은 듯했다. 태극기가 더이상 팔리지 않아 팔려는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간 후에도 마리아는 혼자 태극기를 팔러 다녔다. 낯선 동네에 가서 하늘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고 주문 제작한 깃대 꽂이를 펼친 후 태극기를 꺼냈다. 접힌 깃대를 쭉 뽑아 깃발을 다양한 높이에 매달고 배치에 공을 들였다. 몇은 세우고 몇은 비스듬히 누이는가 하면 몇은 나란히 꽂고 몇은 꽃다발처럼 통으로 묶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며 늘어져 흔들리다 바람이 불면 펄럭이고 바람이 잦아들면 가라앉고 그늘이 드리우면 은은하게 시름에 잠긴 듯한 깃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는 불가해한 아름다움에 전율했고 마치 둘 사이에 어떤 필연성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첫아들의 청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P105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P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