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P75
근데 엄마, 내가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는 거야?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안 힘들어도 되는데, 미워하면 되는데, 왜 우린 사랑을 하고 있어? 왜 이따위 사랑을 하고 있냐고. 눈물도 안 나오고 숨도 못 쉬겠는, 왜 이런, 이런 사랑을 하냐고.- P77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P78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샘솟았고 반희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가슴이 뛰었다.- P79
참 고귀하지를 않구나 이 사람들은, 하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도 고귀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고귀하지를, 전혀 고귀하지를 않다고 베르타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그래도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