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나는 장갑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 뒤를 따라가며 입을 삐죽거린다. 잘린 손 같아, 수재나는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한숨소리로, 높은 건물 사이를 가르는 잘린 하늘 조각의 모습으로 밀어낸다.- P39
그래서 존은 혼자 술집에 간다. 일단은.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존은 해질녘처럼 어둑한 구석자리에 앉아 짧은 양초가 하나 놓인 탁자를 마주하고, 길 잃은 파리 한 마리가 불빛 안에서 맴도는 걸 지켜볼 것이다.- P41
햄닛의 아버지는 남자의 말을 듣는 대신 해가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사다리처럼 내려앉으며 비로 촉촉이 젖은 거리를 밝히는 모습,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케이크, 머리 위쪽에서 비누 냄새를 풍기며 펄럭이는 빨래, 그리고 잠시 아내의—묵직한 머리채를 틀어올릴 때 어깨뼈가 모였다가 다시 벌어지는—모습, 바늘땀이 풀린 자기 부츠의 앞코를 생각한다.- P46
휼랜즈의 창가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면 숲의 가장자리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숲이 가만있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는 신록의 광경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무성한 잎을 어루만지고 훑고 흩뜨린다. 나무는 바람의 손길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박자로 반응하며 가지를 굽히거나 떨거나 흔든다. 바람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양분을 공급해주는 땅을 훌훌 떠나려는 듯이.- P48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큰아들의 어떤 점 때문에, 말편자가 자석에 끌리듯 아버지의 분노와 실망감은 늘 큰아들을 향했다. 아버지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위팔 무른 살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더 힘센 다른 쪽 손으로 쏟아지듯 강타를 날릴 때의 느낌이 늘 그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위쪽에서 급작스럽고 매섭게 날아오는 손바닥의 충격, 나무연장으로 좋아리를 후려칠 때 거죽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어른 손의 뼈는 얼마나 단단하고 어린아이의 살은 어찌나 여리고 무른지. 덜 여물고 덜 자란 뼈를 꺾고 누르기는 어찌나 쉬운지. 온몸을 흠뻑 적시는 분노와 무기력한 굴욕감,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는 매질.- P53
휼랜즈의 창가에 서 있는 그는 떠나고, 들고 일어서고,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렬해 터질 것 같은 심정이다.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두고 간 접시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다. 떠나고, 달아나고, 다리를 놀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은 충동으로 뱃속이 가득차 있으므로.-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