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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그을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밖에 나갈 때 쓰고 다니는 모자도 햇빛에 색이 바래져 있었다. 내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마르고, 뺨이 움푹 패여 있었다. 입술은 더 얇아져 있었다. 그 낯선 얼굴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을 사랑할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다. 헐벗고 비참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 얼굴이 부끄러웠으며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은 나의 냄새와 목소리, 그리고 나의 움직임을 보고 나를 따른다. 얼굴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얼굴을 이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에 공허감만 불러왔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할 일을 찾았다. 일을 시작하며 내 처지에 얼굴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P321
맨 밑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때 시간이 유난히 빨리 흘렀던 것일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 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시간이 특별히 빨리 지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시간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데 나 혼자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미친 듯이 서두르며.- P329
시간은 조용히 정지해 있다. 시간을 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시간의 적막과 정지는 끔찍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집 밖으로 달려나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일에 열중한다. 그러면 잠시 시간을 잊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시간은 다시 나를 에워싼다. 문 앞에 서서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형체도 없이 조용히 나타나 우리를, 풀밭과 까마귀와 나를 포박한다. 나는 시간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시간의 무심함과 그 항존성에 말이다. 시간은 거대한 거미줄처럼 무한히 퍼져 있다. 수억 개의 작은 고치가 시간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다. 햇빛 속에 누워 있는 도마뱀, 불타고 있는 집, 죽어가는 군인,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거기 매달려 있다. 시간은 거대하다. 새 고치들이 들어갈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시간은 끔찍한 그물망이며 내 삶의 매 순간이 거기에 포박되어 있다. 시간이 나에게 더욱 끔찍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아무것도 끝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P330
나보다 먼저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일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허영심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심코 밟아 죽인 풍뎅이는 비극적인 이 사건에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비밀스러운 연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풍뎅이는 그저 내가 걸어가고 있던 순간 내 발밑에 있었던 것뿐이다. 햇빛 속을 맘 놓고 기어가다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고,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직 인간들만이 있을 수도 없는 의미를 찾아 헤매느라 고생을 한다. 내가 언젠가는 이런 인식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몸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굳건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331
인간들도 안쓰럽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인간이 가장 불쌍할지 모른다.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서 자연의 순환을 막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었으며 흉하게 만들고 말았다. 다른 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보다 더 현명한 감정은 없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받고 있는 사람 모두가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만이 나은 인생을 살아갈 유일한 희망,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 죽은 자들은 이제 그 유일한 가능성을 잃고 말았다. 그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뿐이었다.-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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