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내 나이에 남자를 육 년이나 사귀다니. 육 년이나! 그 애가 그나마 내게 남아있는 걸 망쳤어. 그 육 년이면 이렇게 후회막심인 대신, 두세 번은 더 소소하게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었다고···. 육 년간 이어온 관계라니, 남편 따라 식민지에 가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그러고 돌아오면 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몸치장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게 되는 거야.‘- P164
밤이 되어 한가함의 위험에서 해방된 그녀는 과연 얼마나 자게 될지, 또 얼마나 깨어있을지 헤아렸다. 불안정한 이는 한밤중에 큰소리로 하품을 하는가 하면 한숨을 내쉬고, 우유배달부와 도로청소부와 참새들을 저주하기 마련이니까.- P165
자제하지 못한 억눌린 웃음소리가, 하마터면 생의 가장 두려운 기쁨에 빠져들 뻔했다고 그녀에게 경고했다. 포옹, 추락, 이불이 젖혀진 침대, 몸이 잘린 짐승의 살아있는 두 토막처럼 접합된 두 육체···- P174
임박한 쾌락과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에 몰두한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따르며 젊은 연인에게 사려 깊고 진지하고 바람직한 애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패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에 일종의 공포를 느끼며 셰리를 형벌처럼 견뎠다. 그녀는 두 팔로 그를 힘없이 밀어내다가 이내 무릎 사이로 그를 힘차게 붙들었다. 끝끝내 그녀는 그를 부둥켜안으며 가냘프게 울부짖다가 사랑이 고통스런 회한으로 가득 차서 창백하고 숙연하게 떠오르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P178
‘그가 여기 있어‘, 레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무조건적인 안도감에 휩싸였다. ‘그가 영원히 여기 있어‘,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빈틈없는 조심성, 그녀의 삶을 이끌어온 미소를 잃지 않는 상식, 원숙한 그녀 나이의 겸허한 망설임, 그리고 포기, 그 모든 것들이 돌연한 사랑의 오만함 앞에서 물러나며 사라졌다. ‘그가 여기 있어!‘- P179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칫 몸을 움직여 이 화사한 방안에서, 번쩍 거리는 청동 침대의 꼬불거리는 철제 기둥과 불타오르는 듯한 연분홍색 커튼에서 감각하는 시각적 즐거움이 산산이 깨어질까 두려웠다. 전날의 커다란 행복이 마치 물이 가득 찬 크리스털 속에서 춤추는 무지개 속으로, 그 눈부신 반사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P183
방안에 밀려든 눈부신 햇살이 어둠에 묻혀있던 벽지의 꽃무늬와, 벽에서 웃고 있는 샤플랭의 작품 속 금발 소녀의 부드러운 표정을 되살려놓았다. 셰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기억이 그에게 수박 속처럼 신비롭고 원색적인 전날의 침실을, 동화 같은 전등의 둥근 갓을, 무엇보다 그를 비틀거리게 했던 고조된 환희를 되돌려놓게 하고 싶었다.- P185
그녀는 그를 화나게 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그녀의 온 신경이 팽팽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되풀이하는 똑같은 두세 마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옭아 맸다. ‘그가 여기 있어, 내 앞에··· 봐봐, 여전히 여기 있잖아···. 그는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그런데 그가 여전히 여기 있는 건가, 내 앞에, 정말로?···‘- P190
건물 꼭대기 층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추락 중에 느낄 수 있는 어리석은 희망이 그들 사이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