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하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발표할 때, 성민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저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요."
성민이는 친구를 잘 돕는 다정한 어린이이고, 아이들 사이의 다툼도 잘 중재해서 ‘성민이가 있으면 싸움이 안 난다‘고들 할 정도다. 그래서 ‘가족의 행복‘이나 ‘세계 평화‘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챙기는 것이 다행스러워서 물어보았다.
"맞아. 그거 정말 중요해. 그런데 성민아, 그러면 다른 사람들 행복은 어떻게 해?"
성민이는 내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불행하면 저도 안 행복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행복해지게 도와줘야죠."
성민이는 ‘이타심‘이라는 말을 모르지만, 바로 그것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P92
여전히 어린이를 ‘동료 시민‘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분도 있다. 어린이를 보호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어른과 똑같이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시기를 보내면서 그런 분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린이는 교육받을 권리, 놀 권리에 심각한 제한을 받으면서도 방역 주체로서 의무를 다해왔다. 만일 ‘몇 살 이상 성인‘ ‘심각한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 ‘특정 지역 주민‘ 등에게 어린이들에게 하듯이 제한을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만큼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을까?- P95
도서관의 일반 자료실 문 앞에 붙은 ‘어린이는 어린이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눈에 띄었다. 어린이 자료실에는 ‘어른은 일반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없는데. ‘어린이 자료실‘은 어린이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어린이의 공간을 제한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 어린이가 찾고 싶은 책이 일반 자료실에 있을 수도 있고, 어린이도 나처럼 이 책 저 책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 있다. 설마 어린이가 일반 자료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실제로 막아서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안내문을 보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공공시설에서 되도록 안 오기를 바라는 이용자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P119
어린이 덕분에 보게 되는 건 어린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옐로 카펫에서 기다려요" 라는 표지를 보았다. 어린이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보도 안쪽에 서 있으라고 바닥에 큰 삼각형을 그린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차도 가까이 서 있으면 위험하니 세 걸음 떨어지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시각적으로 안내된 걸 보니 반가웠다. 하지만 "노란 삼각형 안에서 기다려요"라고 하면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영문으로만 표기된 간판이나 ‘PULL, PUSH‘ 같은 안내문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당기세요, 미세요‘라고 쓰면 안 될까?- P119
나는 평소에 어린이를 ‘미래의 희망‘ ‘꿈나무‘로 부르는 데 반대한다. 어린이의 오늘을 지우고 미래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 글에서만큼은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다.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사람이다. 오늘의 어린이는 우리가 어릴 때 막연히 떠올렸던 그 미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P122
세상의 어떤 부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을 때, 변화를 위해 싸울수록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미래에서 누군가가 와서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미래에는 나아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미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린이다.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어린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격려하고 보호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민으로서 존중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래가 바로 그러하듯이.- P123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노 키즈 존‘이라는 세련된 말로,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노"라고 말합니다. 어린이가 떠들면 다른 손님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대지요. 여러분, 우리는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시민입니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때는 오직 어린이를 보호할 때뿐입니다. 어린이가 너무 떠들면 중재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그게 또 어려우니까 어지간하면 참게 될 것입니다. 참을 만한 정도는 참는 것. 저는 그게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관용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공공장소에서 악을 쓰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곳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바로 그 어린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자기도 답답하겠지요.-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