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똑같은 속도로 나이를 먹어간다. 특별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름 대로 발전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냥 계속 자라는 것으로 쳐도 되지 않나? 앞 문장에 부사를 너무 많이 썼다. 이렇게까지 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책임을 다해야 할 어른이 나도 아직 자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그럼 몇 살부터 ‘자란다‘가 아니라 ‘늙는다‘가 되는 걸까?- P20
사전적으로는 중년이라 할 수 있는 마흔 살 안팎부터라고 한다. ‘중년‘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원래는 40대까지인데 넉넉하게 50대도 중년으로 친다는 걸까? 사실 나 자신은 아직도 ‘중년‘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만일 중년이 ‘50대까지 포함하지 않는 경우‘라면 나는 이미 중년도 끝나가는 것이 된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언제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나이 타령 하지 말아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린이와 나란히 놓고 보니 내 연령대가 어디에 놓이는 건지,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깨달은 것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산 것이다.- P20
윤서 덕분에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느라 애쓴 동안 윤서는 듣느라 애썼을 것이다.- P38
말하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는 자기를 잘 드러낸다. 어른들도 이런 어린이는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 그에 비해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조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으레 ‘어린이는 떠들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P38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그런데 자신을 꼭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나 연주도 표현의 도구가 된다. 어떤 어린이는 무언가가 표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어린이가 잠자리에 들면서 낮에 본 책 얘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어린이가 하루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잊고 있다가 잠들기 전에 퍼뜩 그림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어린이가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어떤 느낌이나 아이디어는 어린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책을 매개로 어린이를 만나기 때문에 책과 관련된 것만 겨우 엿볼 뿐, 어린이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다. 그 마음속의 일을 바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이가 ‘답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P40
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 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는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P42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경험과 지식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매 형제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