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어머니는 자기 수프에서 고깃조각들을 건져내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좀 피곤해 보이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말도 별로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먹기만 한다. 그에게 내가 지금 얼마나 우리 엄마를 그리워하는지 아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어머니한테 더 잘 대해드리라고, 삶은 허망해 어머니가 언제 훌쩍 떠나가버릴지 알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으시게 하라고, 혹시 지금 어머니의 몸안에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반드시 확인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P22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 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P34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 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P35
엄마의 규칙과 기대는 내 진을 다 빼놨지만, 엄마에게서 벗어날라치면 혼자 알아서 놀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두 가지 충동이 분열된 채로 지냈다. 어느 날엔 결국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타고난 선머슴 기질에 따라 행동했다가, 다음날엔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어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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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방을 치우고, 부모님의 짐 가방을 정리하고, 수건으로 가구를 구석구석 닦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두 분이 돌아와서 내가 한 일을 봐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나는 바퀴 달린 어린이용 침대에 앉아 방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직 두 분의 얼굴이 기쁘게 변하는 모습을 보겠다는 생각에, 내일 아침이면 청소부가 와서 치울 거라는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한 채로. 부모님이 돌아와서 아무 변화도 감지하지 못하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방안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면서 내가 한 착한 일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P39
엄마는 다른 영역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앞세웠지만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무척 관대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억지로 먹게 하지 않았고, 내 몫의 절반만 먹고 남겨도 결코 접시를 다 비우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음식은 즐기는 것이어야 하며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밀어넣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유일한 규칙은 뭐든지 적어도 한 번은 맛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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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내 용기를 칭찬했고, 나 역시 스스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의 무언가가 나를 새로운 길로 들여놓았다. 비록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은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용감한 아이가 되는 것만은 제법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련된 입맛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P42
부모님은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란 집은 책이나 레코드로 가득찬 집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작품 을 구경하거나 박물관에 가거나 그럴듯한 문화시설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읽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나 내가 봐야 하는 외국 영화 감독의 이름 하나 몰랐을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호밀밭의 파수꾼』 구판본도 건네주지 않았고,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이든 뭐든 내가 문화적으로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학습 모델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두 분만의 방식 대로 쌓인 세상 경험이 풍부했다. 두 분은 세상을 실컷 구경했고,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원 없이 맛보았다. 비록 고급문화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결핍을, 자신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세상 최고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으로 만회했다. 나는 순대며 생선 내장이며 캐비아 같은 음식을 마음껏 맛보면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님은 맛있는 음식을 사랑했고, 그걸 만들고 찾아다니고 함께 즐겼으며, 나는 그들의 식탁에 초대 받은 특별 손님이었다.- P43
"엄마가 모자 한번 써보라 해도 너는 싫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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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돌로 살 수도 있겠다는 나의 희망은 그렇게 단박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깐이나마 나는 어쩌면 연예인이 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낱 그 중식당의 애완용 악어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수조에 갇혀 사람들의 심심풀이 구경거리 노릇을 하다가, 나이들어 몸이 더는 수조에 맞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치워지는 신세가.- P62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엄마는 또렷한 한국말로 연신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었다. 엄마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소파에 앉은 아빠 무릎에 기댄 채로 온몸을 들썩이며 흐느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아빠도 같이 울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무서웠다. 그래서 할머니 방에 있던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지켜보던 때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부모님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엄마가 그처럼 적나라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엄마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지금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엄마는 어마어마한 상실의 영역으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서 떨어져 지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한국을 떠난 것에 대해 느꼈을지도 모를 죄책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하듯,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