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서평은 모도(@knitting79books) 서평단 자격으로 다산책방(@dasanbooks) 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스물두 번째 레인』 서평
- 카롤리네 발 장편소설, 전은경 옮김, 다산책방
카롤리네 발의 장편소설 『스물두 번째 레인』은 독일 문학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현실적인 삶의 단면을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소설은 독일의 한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주인공 틸다가 알코올중독자인 엄마와 어린 여동생 이다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꿈을 뒤로 미룬 채 살아가는 틸다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수영장을 찾아 물속에서 버티는 삶의 위안을 얻는다. 그녀의 삶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하고 고통스럽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인물의 조용하지만 깊은 내면의 성장을 그려낸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가족에 대한 책임’과 ‘개인적 자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틸다는 한 사람의 딸이자 언니, 보호자이자 동시에 꿈을 가진 개인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그녀의 삶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오래, 타인의 기대와 가족의 무게에 나를 맡기고 있는가.
작품은 빠른 전개나 극적인 사건보다는,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주인공의 내면이 천천히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처음 읽을 때는 다소 느릿하고 정적인 분위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주는 중요한 미덕이다. 우리의 현실과 닮은 삶, 격렬한 드라마보다는 담담하게 지속되는 날들의 흐름 속에서 진짜 감정이 피어난다.
읽는 내내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는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 비참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한편으로는 나를 다잡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사치스러운 ‘꿈꾸기’가 얼마나 중요한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틸다의 삶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상과도 겹쳐질 수 있는 이야기다.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 그러나 동시에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가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몰입을 선사할 것이다.
읽는 동안 개인적으로 IMF 시기를 떠올렸다. 여전히 웃으며 말하기 어려운 기억이지만, 그 시절 나 또한 가족과 부모를 책임져야 했던 현실 속에서 내가 가진 꿈과 욕망 사이에서 죄책감과 갈등을 겪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그런 기억을 끄집어내며, 나 역시 틸다처럼 어딘가에서 성장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작품이었다.
결국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따뜻하고도 현실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성장과 책임, 자유와 갈등이 맞부딪히는 삶의 진실을 깊이 있게 담아낸 이 작품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