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
▷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 데이비드 재럿
▷ 윌북(willbook)
▷ 2020년 10월 15일
▷ 320쪽 ∥ 474g ∥ 145*220*20mm
▷ 인문학
◆ 후기
▷내용《上》 편집《中》 추천《上》
필멸자(必滅者) 언젠가 죽는 자, 나이를 먹는 자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이 불멸자로 존재하기에, 대조적으로 인간을 죽을 운명을 가진 자로 표현했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는 인간은 필멸자가 아닌 영생을 사는 존재가 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이 이 세상에서 영생을 가진 존재였다면,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른 세상에서 인간은 영생의 존재가 된다. 종교가 마케팅이라면 당연히 영생의 길을 열어준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된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과 개신교의 장례식을 참석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분명 천국으로 가는 길일 텐데, 기뻐 춤추는 사람들은 없고 모두 슬픔에 잠겨있다. 왜 이승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좋은 죽음, 나처럼 가톨릭교도로 자란 사람들은 좋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의 설명서인 교리 문답에 그런 내용이 있다. ‘잠들 때까지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라. 때가 되면 중재를 바라며 성 요셉에게 기도해도 좋다.’ 나쁜 죽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의사들이 고통을 연장하는 연구와 치료를 추천하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를 때까지 치료를 주장하며 환자의 통증과 모욕감을 연장하기도 한다. 환자의 자율성은 어떤가? 그때쯤이면 대개 환자는 사전 동의가 불가능한 상태다. 현대 의학은 생명 보전과 생명 연장에만 초점을 맞춘 채로 환자의 고통이 연장된다는 사실을 뒷전으로 미룬다.”
“200년 전만 해도 인간의 절반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이제 선진국에서는 70대 후반이나 80대 초반까지 생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끔찍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인간성을 상당 부분 앗아가는 심술궂은 질병에 걸려 기억과 자기 자신을 잃으며 노년에 천천히 죽어간다. 개인적 고통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통제력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플라톤은 죽음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이 옳았다. 문제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의사 결정 능력’이다.”
질병, 노화, 치매, 자살, 사고, 돌연사 등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40년간 지켜본 의사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서 말하기 두려워하고 솔직하게 말하길 어려워한다.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좋은 죽음에선 뇌출혈로 병원으로 온 동료 의사의 ‘생전 유언장’에 기재된 ‘연명치료 거부’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나쁜 죽음은 91세의 팔과 다리에 갑작스러운 마비가 온 환자를 예로 든다. 평생 여러 질환과 수술 이력이 많아서 버틸 체력이 되지 못했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살리길 원했고, 넉 달 동안 온갖 현대기술로 연명치료를 했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는 루게릭병으로 인하여 신체의 마비가 시작되고, 점차 언어의 기능도 상실하고, 결국 장기까지 마비되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종우의 병실에는 수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는 배우자를 간호하는 보호자들도 담고 있다. 언어까지 마비되었을 때, 지수에게 가지 말라고, 같이 있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 없어 끝까지 간호한 지수가 옳은 것일까? 사지가 마비되고 말하기조차 버거울 때도 버티는 것이 옳은 것일까? 불타 죽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죽음도 없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불태우지 말고, 제발 총으로 죽여달라고 자비를 구한다. 연명치료 기간에 환자가 겪을 ‘기나긴 죽음’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며, 단순히 물질적인 생존상태가 아닌, 인간적인 삶이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계기가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