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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책 읽기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 가진 모든 것들이 자신이 보고 듣고 알게된 것을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같은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은 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금화가  늘어놓는 넋두리를 듣다 보면 어느덧 입을 열고 나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장편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살인자를 찾는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빨려들게 합니다. 이 작품은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는 죽은 몸의 이야기로 문을 열지만 한 여인을 향한 남자들의 사랑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예술가의 갈등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살인을 둘러싸고 전통화풍을 지키기 위한 이들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표현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이들의 고민이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엘레강스와 에니시테의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은유와 화두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섞일 수밖에 없는 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술탄의 권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는 말 그림을 그린 자를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화가들의 마음가짐을 들여다보며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말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말을 그린 '올리브'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말을 잘 그리는 '나비', 그리고 보수를 염두에 두고 말을 아름답게 그리는 '황새'는 하루가 모여 일생이 되는 삶의 세밀화가들 이라 할 수 있는 인생의 여러 모습을 보여줍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문화적인 충돌을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으려는 이들과 예술적인 전통을 지키기 위한 화가들의 갈등을 섬세하고 신비로운 세밀화를 배경으로 입체적으로 그린 <내 이름은 빨강>은 흥미진진합니다. 빨강이 품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식지 않는 사랑,  죽음의 은유로 쓰인 붉은 피가 새겨진 이야기를 만나 이슬람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야기가 준 반가운 덤입니다.

 

살인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에 책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다가 가슴 뛰는 사랑과 음모와 배신이 뒤얽힌 이스탄불의 어두운 밤거리를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의 모든 사물들이 속말을 들려주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이 시대의 고전이라는 칭송에 손색이 없는 재미와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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