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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책 읽기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 책을 읽습니다. 책에 빠지면 내가 책인지 문장이 내 안에 스며 들어 내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책, 행간을 읽기 두려운 책, 제목이나 표지와 내용이 맞지 않는 책, 읽을수록 가까워지거나 멀리 달아나는 책에서 언젠가 만났거나 앞으로 만날 이들의 모습을 찾습니다.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은 모든 색을 품은 검은 색처럼 오묘한 책입니다. 나를 찾아 가는 여정과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만나 부딪치고 섞이는 이스탄불의 역사와 문화, 터키의 고전이 버무려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닮은듯 하면서도 다릅니다. 어느 날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한 사내의 여정이 결국 자신을 찾아 가는 길과 만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변호사인 갈립은  갑자기 떠난 아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의 아내 뤼야는 터키어로 꿈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뤼야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는 뤼야가 함께 사라진 의붓오빠인 칼럼리스트 제랄과 같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갈립은 그들을 찾아 이스탄불의 작은 골목까지 훑고 다니면서 구석구석에 숨겨진 신화와 전설, 자신의 추억과 맞닥뜨립니다. 그 속에는 터키의 대중문화와 새로 흘러든 서양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거리에서 그들을 찾지 못한 갈립은 제랄의 집에서 제랄이 쓴 칼럼을 읽으며 그들을 추적합니다. 갈립의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한 제랄의 글을 읽다가 제랄 행세를 하기에 이릅니다. 제랄의 이름으로 칼럼을 발표하면서 사라진 뤼야와 제랄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그가 행방이 묘연해진 뤼야를 찾기 위해 제랄의 글을 읽고 그의 생각을 읽고 그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제랄인지 제랄이 그인지 본래 그는 누구였는지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갈립이 제랄의 글을 지도 삼아 아내를 찾아 가는 이 책은 그가  뤼야와 제랄을 찾아 가는 여정이 그려진 장과 제랄의 칼럼을 엇갈리게 실은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색다르고 흥미로운 터키와 이스탄불의 역사와 고전을 담고 있는 제랄의 칼럼들은 따로 떼어내 단편으로 읽어도 또 다른 재미를 줄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 거리와 제랄의 칼럼에서 뤼야를 찾으려 애쓰던 갈립은 마침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아내를 찾습니다. 아내를 찾기 위해 나선 걸음이 나를 찾는 여정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신 안에서 그의 꿈인 '뤼야'를 찾게 됩니다.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에서 갈립이 꿈 '뤼야'를 찾는 길에 동행하며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복잡한 이스탄불 거리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책 앞머리에 실린 지도를 여러 번 곁눈질하며 잰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인 이스탄불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나를 찾아 가는 여러 갈래 길이 만나는 지점을 그린 <검은 책>은 고전과 현대 문학이 어우러져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영원한 물음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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