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지니 2007/08/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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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게 되지만 죽은 사람을 마주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체온이 떨어지고 호흡이 끊긴 사람의 표정 없는 얼굴은 미래의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이든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목숨이 다한 모든 이들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남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억울한 이들이 하고 싶은 말에 귀 기울이려면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합니다.
야만적인 중세의 종교와 문화를 그린 아리아나 프랭클린의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은 부패된 살과 뼈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여의사 아델리아를 통해 암울한 시대의 풍경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로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아델리아는 죽은 자를 위한 의사 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다면 적지 않은 문제들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가 남긴 흔적으로 진실을 캐내는 아델리아는 불쾌감이나 두려움 없이 그들이 전하고 싶은 말을 들으려 합니다.
십자군의 광풍이 몰아치던 12세기경 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셔에서 일어난 잔혹한 아동 연쇄 살인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낳고 통치자인 헨리 2세와 종교계 간의 미묘한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된 아이들의 원한을 풀고, 세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유대인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헨리 2세는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종교에 기대지 않고 능력 있는 여성 검시관 아델리아를 비밀리에 기용합니다.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던 시기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아델리아의 명민함과 용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치밀한 고증과 철저한 조사가 바탕이 되어서 쓰인 사회 문화적인 묘사는 이야기 전개와 어우러져 또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와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것에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하던 교회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준 아델리아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여자로서 개인적인 자신의 행복과 죽은 자들의 의사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델리아의 모습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돋보이고 살인자를 추적해가는 과정이 흥미롭지만 이 작품에 대해 중세의 CSI라는 찬사는 부풀려진 것 같습니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범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에 무리가 없지만 역사 소설로서의 매력이 더 큰 작품입니다.
맹목적인 종교의 그늘에서 왕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를 밑그림으로 십자군 문화와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의 양면성을 이성적으로 고발한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에서 매력적인 아델리아를 만나 즐거웠습니다. 이성과 과학이 들려주는 진실에 귀 기울이며 어두운 시대에 횃불을 들고 앞서 간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2007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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