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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책 읽기
  • 오버스토리
  • 리처드 파워스
  • 16,200원 (10%900)
  • 2019-02-11
  • : 1,80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13쪽)

 

첫 문장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가면 숲의 상층부 오버스토리와 하층부 언더스토리가 어우러진 나무들이 들려주는 끝나지 않는 장엄한 교향곡을 만날 수 있습니다. 리처드 파워스의 나무의, 나무를 위한, 나무들의 이야기 <오버스토리>는 저자가 천 살 넘은 백 미터 높이의 거대한 삼나무에 영감을 받아 쓴 작품입니다. 저자는 나무를 제대로 알기 위해 로키 산맥과 그레이트스모키 산맥등 미국 전역을 둘러보았으며, 120권의 나무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만난 과거와 현재의 나무들이 들려주는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이야기 숲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저자가 원시림이 남아 있는 산기슭으로 집을 옮겨 나무들 사이에서 탈고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무입니다. 남북 전쟁 이전의 뉴욕 브루클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무분별한 개발 벌목으로 북미대륙의 원시림의 98퍼센트가 사라진 1990년대 태평양 북서부의 대규모 목재 전쟁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맹렬한 벌목 반대 운동가들의 새로 심은 나무가 벤 나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꺾이지 않는 믿음은 지금껏 이어집니다.

 

군밤에 취해 청혼한 니컬러스 호엘의 할아버지부터 등장하는 아홉 명은 큰 이야기 숲에 우뚝 선 나무들 같습니다. 각자의 사연이 마디마다 옹이처럼 새겨진 그들은 운명처럼 스스로 한 그루의 나무가 됩니다. 수 백 장의 밤나무 사진을 이어받은 니컬러스 호엘, 아버지에게 뽕나무가 세공된 반지를 물려받은 미미 마, 태어난 해 심은 단풍나무의 벗 애덤 어피치, 연극 맥베스의 ‘움직이는 숲’ 배역을 맡으며 만난 변호사와 속기사인 레이 브링크먼과 도러시 카잘리, 격추당했을 때 반얀나무의 품에 안겨 생명을 구한 공군 더글러스 파블리첵, 청각 장애가 있지만 나무와 소통할 수 있는 패트리샤 웨스터퍼드, 감전 이후 나무의 소리를 듣게 된 올리비아 밴더그리프, 이들은 소멸 직전의 미국의 원시림을 구하기 위해 모여 끈처럼 이어집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서 한 나무의 퍼진 가지 아래로 밖으로 달려 나가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하나의 씨앗에서 움튼 싹이 자라 숲을 만듭니다. 원시림을 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 나무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나와 나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단어가 행동이 되는 격렬한 환경 운동으로 이어지게된 것 같습니다. 이 나무들의 나라에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40억 년의 지구 역사를 하루로 줄였을 때 하루의 끝자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부학적으로 현대의 인간은 자정이 되기 4초 전에 나타납니다.”(666쪽)

 

오버스토리를 읽으면 언더스토리까지 알게 됩니다. 숲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 내 삶의 나무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책에서 나무들 틈에서 인간 나무가 되어 숲을 구하는 이들은 장애를 가진 이와 비장애인이 서로 짝을 이뤄 제 몫을 다합니다. 다리를 저는 더글러스와 미미,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레이와 카잘리, 청각 장애가 있는 패트리샤와 데니스는 함께할 때 서로의 빛을 발하게 해줍니다. 장애를 가진 이가 기대는 삶이 아니라 서로 각자의 역할을 하는 짝입니다. 가상세계의 거목 게임개발자인 닐리는 휠체어 탄 천재입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생채기가 생기거나 옹이가 박히게 마련인 인간 나무들이 숲을 이룰 때 어떻게 어우러져야 온전하게 한 그루의 나무로 뿌리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 세기가 지나서 뿌리가 지하에서 서로 엮일 다른 뿌리를 찾았을 때 느끼게 될 감정처럼, 기분이 좋다. 사랑에는 제각기 발명된 수십만 가지 방식이 있고, 각각 이전 것보다 더 독창적이다. 하나하나가 전부 계속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어낸다.”(206쪽)

 

밤나무, 반얀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삼나무, 세상의 모든 나무... 이들이 모여 만든 숲의 이야기 나무의 이야기, 씨앗의 이야기를 만나 행복했습니다. 기다려주지 않는 나무의 시간들에는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쓸모를 찾지 못한 것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종자를 보존하는 작업을 하는 패트리샤에게 기자들이 재앙에 닥쳤을 때 사람들에게 유용할만한 종자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아직 유용성을 발견하지 못한 나무들을 보존합니다.”(547쪽)

 

주머니 속에 넣어둔 여섯 톨의 밤에서 시작한 이 소설은 뿌리에서 시작해 종자로 매듭짓습니다. 종자의 이야기를 통해 쓸모 있다는 것의 의미와 아직 쓸모를 찾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를, 더 쓸모 있어질 많은 것들을 홀대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다.”(702쪽)

나무의 말이 들리시나요? 들어오세요. <오버스토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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