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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님의 서재

   나는 가끔 세상에는 별이나 달, 시인의 감수성과 ‘엄마’ 라는 단어에서 울려 퍼지는 센티멘털리즘 같은 것만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엔트로피⌟는 맞기 싫은 주사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주사를 맞는다. 책을 읽은 후 줄곧 드는 생각이 있다. 엔트로피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주사와도 같은 ‘유익한 지식’이라는 점이다. 작자의 말대로 세상의 종말을 늦추기 위해 맞아두어야 하는 예방주사 말이다. 역자도 말했지만, 이 책은 그 내용에 동의하든지 반대하든지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생각해봐야할 시급한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찬반을 막론하고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이런 식의 긴장을 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엔트로피를 읽고 한번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그 자체가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가는 내내 나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의문은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센티멘털리즘과 관련된 것이다. 그 의문은 이 책의 내용에 따라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시, 더 나아가서 문학에 대입해 보는데서 출발하였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세상을 감성의 잣대로 바라보고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학자나 철학자는 이성의 잣대로 세상을 관찰하고 정리한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작업에도 무질서가 생겨날까?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수많은 시어들이 생성되고 버려지는 과정에서도 ‘엔트로피 법칙’이라는 것이 적용될까? 버려진 시어들이나 창작을 하는 동안 쌓였던, 수없이 고민하고 사유한 뒤 버려진 생각들도 이 책의 논리대로 ‘무질서’나 ‘쓰레기’일까? 책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어느 부분에도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는 말에 따른다면 말이다. 조금 더 확장시켜본다면,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제5부 엔트로피와 산업시대] 장에서 ‘교육’ 부분에 언급이 되어있다. 책 내용에는 문학적 사고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정신적 측면에 대한 부분이 예술적 사고를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보았다. 그렇게 보았을 때 아까 말했듯이 창작에서 난무하는 정신적 활동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작자의 주장에는 커다란 전제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되도록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을 하자면, ‘엔트로피적 의미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내의 에너지 흐름을 주변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최대한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과 생명의 종말이 좀더 늦게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정말 옳은가?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의문이다. 세상은 악착같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현대인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해서 익숙하게 배우고 사용해 온 문명과 환경이 있다. 작자가 비판한 실용주의자들의 태도를 인용해보자. ‘실용주의자는 기존의 에너지 흐름을 효율화시켜서 시간을 “절약”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엔트로피 과정이 더욱 빨라진 뿐이며 그와 함께 앞으로 우리 후손들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내가 생각하기로 현대인이 작자의 생각을 십분 반영해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은 실용주의자의 태도 정도이다. 우리는 물을 아껴 쓰고, 태양에너지를 병행하여 사용하면서 에너지를 아끼는 일 따위에는 얼마든지 협조할 것이다. 그것이 지구의 종말을 늦추는 일이든 생활비를 아끼는 일이든 말이다. 그러나 작자가 말한 해결방안은 얘기가 다르다. 이 책의 이론은 아주 매혹적이고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나도 저 엔트로피의 효과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책에서 보여주는 대안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층아파트를 건설한 건설회사에게 새집증후군에 걸릴 만한 위험물질이 기준치 이상 검출 되었으니 그 집을 허물고 초가집을 지으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몇 십년간 이용했던 양변기를 포기하고 뒷간을 이용해야 하고, 편리한 중부난방을 포기하고 장작을 패다 군불을 때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가? 지구 종말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그래서 더 많은 후손이 몇 대라도 대대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것은 희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 엔트로피를 추구하는 것은 후손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도 더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쥐어준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과연 현대인의 몇 퍼센트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와 대대손손 안락한 삶을 위해 불편한 저 엔트로피를 몸소 실천해나가려 할 것인가? 그것도 삶의 일부분도 아닌 생활 자체, 사고 자체를 뒤집어야 한다면 말이다.   요컨대, 작자의 이론은 책에도 언급했듯이 뉴턴의 법칙을 압도할 말한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나도 그러한 이론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제시된 대응방안에 대해서는 실망이 컸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매 시대마다 사람들은 세상의 훼손이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세상은 어느 정도 병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세상이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기 직전의 위급한 상황이라 해도, 우리 인간이 그렇게 노력해서 세상의 목숨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겠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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