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 다산북스로부터 도서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진 것이 없었어도 분명 행복했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때 자유는 분명 존재했으니까요.
고물과 면포와 시탄이면 족하였던 종전까지의 서민들, 어떤 세월, 태평성대라던 치하에서도 그런 것들은 충분했을 리 없었을 텐데 하물며 일제에게 강토를 빼앗겼고 인성이 유린당하는 민족적 수난 속에서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것들이 서민들 생활에 기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4부의 시작은 강쇠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김환의 심복으로 지리산에서 숯 굽는 천민으로 덩치가 크고 순박하고 의리가 있던 그는 일본인에게 대항하다 경찰서에 붙잡혀 온갖 시달림을 당하다 겨우 풀려나 송관수를 찾아가 하소연을 합니다.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라는 그런 말들이 김환이 살았을 때 이미 다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김환은 이제 없습니다.
부산에서 며칠을 묵은 뒤 산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을 한번 보고 눈을 감으려 했던 일, 열 살 난 딸애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일, 마치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죽음의 사자가 급작스럽게 달려와 숨 돌릴 새도 없이 일을 끝내버린 일이 파노라마가 되어 스치듯 지나갑니다. 모친의 초상 때 해도사가 와서 장례를 도와준 일은 또 고마웠습니다. 안면은 있었으나 이삼 년 만에 한 번씩 거쳐를 옮긴다는 해도사라는 인물에 마음이 갔습니다. 딸에게는 짝쇠와 채귀에 쫓겨 산으로 도망 온 안또병이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강쇠는 영혼이 빠져나가고 없는 죽은 사람의 눈처럼 유리알 같았다고 작가는 표현했습니다. 사연 없는 사람하나 없는 토지 속 인물들 강쇠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용과 임이네 사이에서 난 아들 이홍은 아버지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이용이야말로 멋진 사내였다 스스럼없이 생각하고 열사도 우국지사도 아니었고 그저 농부에 지나지 않았던 한 사나이의 생애가 아름다웠고 자신의 존엄성을 허물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자식이 인정을 하니 헛되이 살지는 않았나 봅니다.

서희는 장성한 두 아들들이 어려워졌고 품 밖에 나가버린 아들에 대한 어미로서의 외로움도 있었으며 어두운 현실과 찬란한 삶을 마주하여 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투쟁의 차비를 차리는 아들을 보면서 무섭고 끈질겼던 집념은 다 어이로 갔는지 이제 서희는 이를 악물며 열 손톱이 닳아빠져도 기필코 탈환하리라 맹서하였던 평사리의 옛집, 추억은 살아서 구석구석에 능소화가 지천이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감추지 못했습니다.
“남의 불행을 쪼아먹고 사는 까마귀, 희번득이던 눈빛은 소름끼치도록 기분 나쁜 것이었다.”
“자신이 행한 일, 생각하는 일을 이해하지는 못하여도 열심히 들어줄 거란 기대같은 것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학생이 아니면 소년으로 제외되기 일쑤였고, 집안에서는 귀한 도련님, 주변에선ㄴ 부잣집 아들, 가슴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국이 집에 데리고 온 김제생을 쌍계사까지 데려오기는 했으나 막상 와 보니 터놓고 얘기해 볼 만한 중이 없어 난감한 상황에 자신은 서울로 떠나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 괴로워하며 내가 약한 거는 항상 상대들이 약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강하고 싶어서 강해진 거는 아니고 부잣집 아들, 일등으로 졸업하고, 얼굴도 잘생긴 동경 유학생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자신의 약점은 아버지가 옛날 하인이었다는 것 그래서 어릴 적 순철의 머리통을 깨버린 일을 장 서방에게 이야기하며 짐제생을 그에게 맡긴 채 크고 작은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가자 마음먹습니다. 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본능 앞에 세워진 살아야 하는 명분, 그것은 위장의 생애를 강요당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죽음이 두려운 본능 앞에 소지감이 가문을 잇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강요된 상태를 말하는 문장입니다. 소지감은 이범준의 이종사촌형이면서 의병에 가담한 형이 포살당하고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본 부친이 자결했을 때 가문의 존속을 위해 살아남아야 했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인물입니다.
어디가나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실질적인 영주로서 군림해온 최참판댁을 둘러싼 갖가지 불행한 내력과 불길한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공포로 남아 있었지만 누구하나 입으로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집에서 비명횡사 안한 사람이 거의없고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그런 것에 대한 염려나 두려움은 담을 쌓은지 오래지만 설령 귀신이 찾아왔다 하더라도 날 잡아 잡수하는 심정으로 미래도 희망도 욕망도 두려울 것도 없이 다만 심란한 심정으로 도식에게 구천이 이야기까지 합니다.
한편 조용하는 명희와의 이혼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그리고 형수를 좋아하는 용하의 동생 찬하까지 넘어야 할 일들은 첩첩산중이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인생들이 천석꾼은 천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가지 걱정, 여옥과 명희는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반백의 할머니의 단 한가지 걱정을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땀이 흐르는 얼굴에는 평화스러웠으며 앉은뱅이 아들 그것이 걱정일 뿐이었습니다. 4부의 시작은 각기 다른 사람들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속 사정은 다 알수 없으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 다 힘든건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우리의 길상이 아직 풀려나지 않아 걱정이네요.
1930년대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민중의 의식 구조와 서양 문물의 유입, 일본의 폭력적 지배를 세밀히 묘사해 준 점이 13권이 인상깊에 느껴졌습니다. 작품 속 강쇠가 회상하는 김환의 이야기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몰락을 보여줍니다. 후반부에 그려지는 여성 서사의 이야기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뇌를 생각하게 합니다. 14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