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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ordin님의 서재
  • 외로운 도시
  • 올리비아 랭
  • 13,500원 (10%750)
  • 2017-01-16
  • : 1,026
이 책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작년 여름쯤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알게되었다. 사실, 잡지를 통해서 알게됐다. 그 잡지는 킨포크였다. 얼마나 길게 이 책에 대해서, 외로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지,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하고 찾아봤더니 마침 그 도서관에 있었다. (*좋은 잡지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
책을 펼쳤더니, 이런 말이 써있었다.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 그리하여 첫 페이지부터 홀려서 읽은 책.
너무나 밑줄을 많이 그어서 기록하는 것만도 한참 걸렸다. 


외로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할지를 코치하거나 외로움을 소재로 가볍게 소비하는 책은 많다. 특히 예술과 연결지어 이야기하는 책도 많다. 그런데 이 책, '외로운 도시'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제대로 바라본다. 당신이 외로움에 잠못들어 뒤척이는 그 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아침마다 지겹게 새로 뜨는 태양에 대한 증오를 가만히 들어준다. 울면 우는대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대로 옆에 앉아 귀를 기울여준다. 이제 그만하라고, 정신차리라고, 혹은 너 너무 예민한 것 같다고.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냐고, 혹은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유난떨지 말라고 핀잔하거나 바른말하지 않는다.
시작은 올리비아 랭 개인의 체험으로 부터였다. 영국사람인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건만, 살던 곳 다 정리하고 왔더니 그 남자는 없다. 음. 그 시기에, 그녀는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정말 지독한 외로움을 경험했다. 그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30대 중반으로, '그것은 혼자 있는 여성이 더는 사회적으로 허가받지 못하는 나이이며, 낯섦, 일탈, 실패의 냄새를 끊임없이 풍기는 연령대다.' (p30) 30대 중반 여성이 다 그런거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그게 사실인걸 인정하게 된다. 그게 사실이라는 말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의식하는 불안이 내게 그렇게 말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 책은, 이렇게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도, 당신도 외롭다. 이제 외로움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게 과연 무엇인지 들여다 보자. 알아보자. 심지어 그것에서 태어난 것들을 바라보자. 바라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기다려보자.
올리비아 랭은 유려한 문장과 솔직하고 다정한 문체로 엄청나게 고독을, 고독과 예술을 탐구한다.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믿음직스럽게. 
그녀가 바로, 그 지독한 외로움을 예술을 통해서 위로 받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가 다정하게 펼쳐지니 믿음직스러울 수 밖에.
나는 사실 이 책을 에드워드 호퍼와 앤디 워홀 같은 근사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외로움이라는 소재와 연결한 에세이들 모음집 정도로 생각했다. 나도 외롭다 외롭다 말만 하고 울기나 했지 이렇게 외로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다. 읽으면서 내내 감탄했다. 와, 나의 질문들이 여기 있구나. 
그리고, 이 책 덕분에 알게된 보물같은 아티스트들이 있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헨리 다거등등. 그리고 호퍼에 대해서, 워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알게 되었다. 외로운 사람들이었더라. 호퍼는 좀 비뚤어지기까지 한 것 같더라. 아내한테 너무했다. 호퍼와 워홀이 외로움을 자기 방어 기재로 사용한데 반해,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와 헨리 다거는 그 외로움을 그대로 노출했다.  특히 데이비드 워나로위츠가 그랬다. 그는 적극적으로 외로움을 연대와 창조라는 대안으로 대면했다. 외로움은 나 자신,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도 그렇지만, 헨리 다거는 정말 너무나도 힘든 인생을 살았다. 학대와 가난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는 정신병 판정을 받아서 그의 작품은 미치광이의 것이라고 외면되기도 했고, 어린이를 소재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와 성적인 표현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니 그래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늦게서야 주목받게 되었는데, 여기 '외로운 도시'에서 올리비아 랭이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외로움에 대해서 털어놓다가 친구와 크게 다툰 적이 있고, 외면 당한 적이 있고,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의 품에 안겨서 너무 외롭다고 펑펑 울기도 했고, 눈물 콧물로 그의 옷을 망쳐놓아도 외로움은 가시질 않았고, 이해받지 못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가 부끄러웠고, 한편으로 매우 안타까웠다. 사실, 이 좋은 책을 읽고도 잘 모르겠다. 내게 외로움의 태풍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할지. 하지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외로움을 이기는 법이라던지, 대처법 등을 코치하지 않는다. 문제는 늘 사라지지 않았다. 외로움도, 어려움도, 지난 날의 상처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기. 나의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않기. 제대로 바라보기. 그리고, 이 책은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타인의 외로움을 바라보기. 유령을 알아채기. 유령이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 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을 쓴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에, 약자의 아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결국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공감능력이라고 간단히 말을 해볼까. 나는 물론 타인의 외로움이나 아픔에, 감정에 무지하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고 상상하며 귀를 기울여서 이야기를 듣고 보고 관찰한다. 나의 감정만큼이나 다른이의 감정은 중요하다. 나와 당신은 너무나 다르지만, 나의 아픔에 당신이 귀기울여주고 눈물을 바라봐 준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상상해준다면, 불가능할 것 같은 소통도, 그 이상의 것도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랑도 따뜻한 세상도 소망할 수 있지 않을까? 들쑥날쑥 달라서 사랑이 가능하다. 모두 같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닐 테다. 모두 같다면 당신을 어떻게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만나고 싶은 당신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조금 힘이 난다. 힘을 내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고개를 든다. 그리고 느낄 수 있을 때 외로움이든 아픔이든 슬픔이든 느끼자고, 느끼고 비축하자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독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줄 수 있고, 그것에 맞서 무기도 들 수 있으며, 명백하게 소통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검열과 침묵에 저항할 수 있다.(...)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고독이란 사람들이 그 속에 머무는 장소임을. 도시에, 맨해튼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공간에 거주할 때 어떤 사람이든 처음에는 길을 잃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정신적 지도, 각자 좋아하는 방향과 더 잘 가는 노선들이 개발되어 하나의 컬렉션을 구성한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정확하게 복제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미궁이다. 그 시절 내가 쌓아올렸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내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짜맞춰진 고독의 지도다. 나는 외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었고, 고독과 예술 사이의 복잡한 관계의 지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p20
고독은 아주 특별한 장소. 윌슨의 발언에 담긴 질실을 보기가 늘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내내 그의 말이 옳다고 믿게 되었다. 고독은 가치 없는 체험이 결코 아니며,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의 심장에 그대로 가닿는다는 것을. 외로운 도시에서 경이적인 것이 수도 없이 탄생했다. 고독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고독을 다시 구원하는 것들이.
-p20
나는 그전에도 외로운 적이 있었지만, 이때처럼 외로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하지만 그 무렵엔 고독의 계시, 어디에나 있지만 응답이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내게 뭔가가 결핍되었다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 내게는 없다는 느낌. 그리고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서도 나 개인의 어떤 중대한 결점 탓이라는 생각. 이런 모든 것이 전반적으로 무시당하게 되는 반갑잖은 결과를 재촉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30대 중반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혼자 있는 여성이 더는 사회적으로 허가받지 못하는 나이이며, 낯섦. 일탈. 실패의 냄새를 끊임없이 풍기는 연령대다.
-p30
(...)고독은 사람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피하려고 애쓰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경험인 것 같다. 이 기피증에는 정신과 의사들 처지에서 그 주제의 명백한 과학적 규정을 꺼리는 이상한 태도도 포함된다. (프롬 라이히만)
(...)고독은 워낙 부끄러운 체험처럼 느껴지고 우리가 누릴 것으로 예상되는 삶과 너무나도 상반되기 때문에, 점점 더 허용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p44
그들이 예전에 외로웠다면 이제 그들은 그 고독을 경험했던 자아를 이해할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상황이 그런 식으로 유지되는 편을 선호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탓에 그들은 지금 고독한 사람을 이해해주지 않고 아마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일 확률이 더 높다.(로버트 와이스)
-p47
고독을 체험하게 되면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사회적 위협의 과민경계심이라 일컫는 것을 작동시킨다. (...) 저도 모르게 빠져든 이 상태에서 개인들은 점점 더 부정적인 기준에 따라 세계를 살아가는 경향이 생기며, 무례함, 거부, 마찰의 사례를 예상하고 기억하게 되며, 온화하거나 친밀한 상호작용보다 그런 것들에 더 많이 기울고 신경 쓰게 된다.(...)
이 말은 곧 사람들이 외로워질수록 사회가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가는 숙련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절실해도 고독은 주위에 곰팡이가 피고 물때가 낀 것처럼 접촉을 방해하는 방어막을 두른다. 고독은 저절로 자라나며 스스로를 확대하고 영속화한다. 한번 시동이 걸리면 그것을 없애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것이 내가 비판에 대해 갑자기 과민해지고 끝없이 노출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고 샌들을 터덜거리면서 익명의 존재로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주눅이 드는 이유다.
-p48
프리다 프롬-라이히만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던가?"제1인물의 고독이 밖으로 표출될 때 주위에 불안을 조성하는 성향 때문에 제2 인물의 공감능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고독한 상태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연결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순간 연결을 금지하는, 문자 그대로 혐오스러운 본능적 감각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포착하는 것은 무서울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것들은, 그의 그림은, 감상적이지는 않지만 지극히 깊이 있는 관찰을 담고 있다. 마치 그가 본 것이 흥미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고할 가치, 자신이 본 것을 그림에 담는 힘든 수고를 할 가치가 있는지, 고독이 봐줄 만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그보다도, 바라보기 그 자체가 해독제인 것처럼, 고독의 기묘하고 소외적인 마법을 물리칠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p70
(...) 점점 커지는 밸러리(밸러리 솔라나스)의 고독과 고립은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거부하던 어떤 것을 그녀가 발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p124
(...)편집증은 불신과 위축이라는 그 자체의 메커니즘만으로도 고립시키는 성질이 있지만, 감옥생활처럼 스티그마도 남긴다.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성의 표식을 알아본다. 그들은 길거리 불평분자를 비켜 지나가고, 전과자를 기피하며, 실제로 폭력을 가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따돌린다. 내가 하려는 말은, 고독이 전개되는 악순환은 단독으로가 아니라 개인과 그들이 놓여 있는 사회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불공평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일 경우, 그런 과정은 더 악화된다.
-p130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나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에 맞먹을 만한 여성 이미지를 생각해내려고 계속 애썼다. 도시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여자 이미지, 제멋대로 활동하고 밸러리 솔라나스의 태도를 따라 하는 여자.
(...)대신에 나는 그레타 가르보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남자 신발을 신고 남자용 트렌치코트를 입고 도시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하는 강인하고도 꿈꾸는 듯한 사진들. <그랜드 호텔>에서 그레타 가르보는 "혼자라면 to be alone 좋겠다"고, 그 유명한 구절을 말했다. 그러나 실제의 가르보가 원한 것은 혼자 되고 to be left alone 싶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아주 다른 문제다. 신경 쓰이지 않고, 보는 사람 없고, 쫓겨다니지 않는 상태 말이다. 그녀가 갈망한 것은 프라이버시, 관찰되지 않고 혼자 부유하는 경험이었다. (...)
-p174
나는 그 선언을 사랑했으며, 그 마지막 문장을 특히 사랑했다. 나는 내면의 삶의 고요에서 내가 해방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섹스의 꿈 아닌가? 신체 그 자체에 의해 신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리라는 것, 바라마지 않던 그 이상한 언어가 드디어 이해된 것이다.
-p189
(...)극도의 빈곤도 극도의 부도 과도한 소유를 향한 갈망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하지만, 정상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상하고 괴팍한 행동으로 소개되는 모든 경우에서 그런 경계 위반은 결코 건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경계를 어기는 문제가 아닌지 물어볼만하다.
-p240
(,,,)고독은 받아들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융합되고자 하는 갈망이기도 하다. 아무리 깊이 파묻혀 있거나 방어된다 해도 그것은 자아가 부서져 파편이 되었고, 그중의 일부가 누락되었으며, 그것이 세계 속에 내던져졌다는 인식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 부서진 조각들을 어떻게 다시 맞출 것인가? 여기서(클라인의 말에 따르면) 예술이 개입한다. 특히 콜라주라는 예술, 반복적인 작업, 하루하루, 한 해 또 한 해, 찢어지거나 갈라진 이미지를 땜질해 붙이는 작업이 그렇지 않은가?
-p247
가끔은, 감정을 느껴도 좋다는 허락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을 때가 있다. 가끔은,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 사실은 감정에 저항하려는 시도나 그 주위에 가시처럼 돋아나는 수치심일 때가 있다.(...)
-p253
스티그마 찍기가 접촉을 거부하기 위해, 격리하고 꺼리기 위해 설계된 절차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것이 언제나 비인간화하고 비개인화하는, 인간 존재에서 한 개인을 축소하여 원치 않는 속성이나 특질의 보유자로 만들어버리는 목적에 종사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주된 결과 가운데 하나가 고독이며, 수치심 때문에 고독이 더 가속화한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수치심과 고독은 서로를 증폭하고 몰아붙이는 속성이다.(...)
-p267
고독과 배척당하는 경험 모두 스트레스가 크고 신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스티그마가 찍히면 강한 신체적 영향이 발생한다는 것이 충격적일 수는 있겠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충격일 것도 없다. 사실 스티그마와 에이즈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온 UCLA의 심리학자들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HIV 양성 반응자들에게서 HIV의 진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 간단히 말해, 스티그마가 찍히면 단순히 외롭고 굴욕적이고 수치를 겪는 데 그치지 않고 죽게 된다.
-P269
공포감은 전염성이 있고, 잠복 상태의 편견을 뭔가 더 위험한 것으로 바꾼다.
-P271
"내가 혈관들을 갖다붙여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 당신을 붙잡아놓기 위해 우리의 혈관을 땅에, 이 현재의 시간에 부착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 내가 당신 몸을 열어서 당신의 피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당신 눈으로 내다보고 당신의 입술과 내 입술이 영원히 한데 합쳐질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데이비드 워나로위츠)
데이비드가 죽음 앞에서 처음 보인 반응은 고독이었지만 그는 사람들과 힘을 합치고, 연대를 맺고, 변호를 위해 싸우는 방법으로 그 감정에 대처하기로 했다. 그가 평생 겪어온 강요된 고립과 침묵에 저항하며, 그 일을 혼자가 아니라 타인들과 힘을 모아 하려는 것이다.(...)
-p283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부서진 상태였다. 그런데 심술궂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일체감을 회복한 것은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또는 사랑에 빠짐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만나봄으로써, 이 연결을 통해서, 고독과 갈망은 그 사람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의미할뿐이라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p390
고독이 반드시 누구를 만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개인으로서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스티그마와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임을, 그래서 저항할 수 있고 저항해야 하는 대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적인 것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고독은 집단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시다. 그 속에 거주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규칙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 있고 열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존재했던 것들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을 위한 시간이 영영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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