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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ordin님의 서재
  • 이 시대의 사랑
  • 최승자
  • 10,800원 (10%600)
  • 1981-09-01
  • : 13,706
언젠가 여행지에서 뉴스를 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 아랍 여인 무리를 보았다. 아마 알자지라 방송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저 깊숙이 끓어오르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정말 컸고, 고막을 할퀴는 것 같은 슬픈 소리였다. 미안하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같이 보고 있는 이들때문에 차마 채널을 돌리지는 못하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뉴스를 보고 있는 무리 중의 한 명이 내게 어디가냐고 물었다. 이 소리가 듣기 힘드냐고. 이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내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고.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는 그녀들과 비슷한 피부색과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당황했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금은 그 말이 종종 떠오른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읽으며, 그 때의 크고 슬픈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 메마른 사막. 무덤. 빈집.시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깊었지만, 잠시 다가가서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 사람, 지금 이 목소리로 소리내어 이야기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나까짓게 들으나 마나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들을 수록 내가 내는 소리같다.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다면 당당히 고독하고 싶을 뿐.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라는 시의 마지막 행에'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부재를 무심하다고 표현한 것과, 신발들이 쓰러져 운다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사무쳤다. 퇴근 후, 제일 먼저 마주하는, 현관에 쓰러진 내 신발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 중의 한 두짝은 꼭 밟으며 안으로 들어선다. 나의 현관에는 비어있는 신발들이 많다. 
그리고 무심한 부재는 소화가 잘 안 되었다. 무심할수록 이해하고자 부재할수록 찾아가고자 했다. 노력한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몰라야하는 것도 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았다. 나는 무언가를 깨닫는데 오래 걸리는데 그런 걸 보면 고집도 참 세다. 무르팍이 깨지고 이마에 피가 나야 깨닫는 것 같다. 나이는 꿀떡꿀떡 잘도 삼키면서 소화는 도통 못시키는 것 같다. 음력으로 따지는 새해가 오고있다. 새해는 복을 많이많이 받자고 서로서로 인사한다. 새해라는 새공책이 주어진거라고 치고 새해 결심 혹은 소원을 빌어보자면, 올해는 조금 더 잘 상처받고싶다. 잘 버리고 잘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좀 더 지혜로워져서, 잘 울고 싶다. 그렇게 강해졌으면. 음, 쓰고보니 '잘'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잘'은 기도같은 것. 반드시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원입니다. 강해져서 결국에는 따뜻하고 넓은 사람이 되고싶다.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이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개 같은 가을이‘中
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中

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
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
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
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
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
인 줄 아느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中
달려라 시간아
꿈과 죄밖에 걸칠 것 없는
내 가벼운 중량을 싣고
쏜살같이 달려라
풍비박산되는 내 뼈를 보고 싶다.
뼛가루 먼지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흐흐흐 웃고 싶다
-‘버려진 거리 끝에서‘ 中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
...
아 썅! (왜 안 떨어지지?)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올여름의 인생 공부‘中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삼십 세‘中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식은 사랑 한 짐 부려놓고
그는 세상 꿈을 폭파하기 위해
나를 잠가놓고 떠났다.
나는 도로 닫혀졌다.

비인 집에서 나는
정신이 아프고
인생이 아프다.
배고픈 저녁마다
아픈 정신은
문간에 나가 앉아,
세상 꿈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린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기다림을 벗고 싶어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
따듯한 무덤을 마련하고 싶어

천천히 취해가는 술을 마시다
천천히 깨어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보면 내 얼굴이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스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멜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던 온밤 내 시계 소리만이
빈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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