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없음을 이용하기
kidordin 2019/02/06 15:55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이 말이 마음에 콕 남았다. 이 단어, '없음'은 자주 등장한다. 마치 이 희곡의 등장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리어왕은 '없음'이 되는 것이 두려워 계속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쫓다가 정작 정말로 '없음'이 되고 만 것은 아닐까?돈도 사랑도 권력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더군다나 죽음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석고 거만한 리어왕을 보며 딱하면서도, 그에게서 나의 모습도 보았다. 내가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바보처럼 기뻐했다. 기쁘고 기뻐서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의 두려움이 겸손하게 내 맘에 빼꼼히 얼굴을 디밀었을 때, 나는 외면했다. 나는 무엇을 가질 수가 없는데, 인생은 줬다가 뺏는 것인데, 나는 내가 잘나서 가진 줄 알았다.
글로스터가 눈이 멀고 죽겠다고 절벽을 찾아 올라가는 대목은 눈물이 났다. 거지로 변장한 아들 에드거가 그를 평평한 곳으로 이끌며 여기가 절벽이라고 데려가는데, 그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날 좀 죽게 내버려두라는 눈멀고 모든걸 잃은 글로스터와, 일어서라고 손내미는 아들. 그는 평평한 땅을 낭떠러지인줄 알고 뛰어내렸고, 살았다. (당연히!) 그리고 지금부터는 견디겠다고 고난이 됐다고 항복할때까지 견디겠다 말한다. 연극으로 올려진다면 이 대사는 어떤 어조와 억양으로했을지 궁금하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대목이다.
최악을 말 할 수 있는 한 최악은 아니다.라고, 에드거는 말한다.비극을 읽는 것, 비극을 말하는 것. 이것은 없음이 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아닐런지. 인생이 아무리 고난과 죽음앞에 허무할지언정, 우리가 고민하고 절망하며 울고 그것을 극복하려 아등바등 노력하는 동안 이야기는 탄생하니 말이다. 가만히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한, 나는 나로서의 인생을 창조할수 있을 것이다. 실패와 결핍이 나쁜 것 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것또한 분명한 인생의 한 모습이니.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인생에 길들여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행복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가.때론 비극이 이토록 위로다.
리어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다시 해봐.
코딜리아 소녀 비록 불운하나 제 마음을 입에 담진 못하겠습니다.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p18
코딜리아 그래도 전하께 간청컨대
의도 없이 말로만 기름 치는 기술이
제게 없기 때문에-좋은 뜻이 있으면 전 말에 앞서 실천하니까요.-이건 밝혀주십시오.
전하의 은총을 제게서 앗아간 건
사악한 오점이나 살인 혹은 추잡함,
부정한 행위나 천한 짓이 아니라
그것이 없기에 제가 더욱 부자인
늘 조르는 눈빛과, 못 가져서 전하의
사랑을 잃었지만 안 가져서 저는 기쁜
혀라는 사실을.
p24
바보 (...)(리어에게) 아저씨, 없음을 이용할 줄 알아?
리어 글쎄 몰라. 없음에선 없음만 나오니까.
p45
바보 그녀의 찌푸린 눈살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때 당신은 괜찮은 친구였는데, 이젠 값없는 숫자 영이 됐어. 난 지금 당신보다 낫 다고,
난 바보지만 당신은 없음이니까.(...)
p48
리어 오, 너무 질긴 내 가슴아! 아직도 버티느냐?
p83
에드거 이렇게 멸시받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겉 아첨에 속 멸시보다는 낫구나.
운명의 여신이 포기한 맨 밑바닥 인생은
언제나 희망 품고 공포 속에 살진 않아.
통탄할 변화는 최상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최악의 웃음으로 되돌아가는 법. 그런, 불어라, 내 가슴에 안기는 실체 없는 바람이여.
최악으로 떠밀려 간 비참한 이 몸은 너에게 빚진 게 없단다.
p119
글로스터 갈 길이 없으니 눈은 필요 없다네. 보았을 땐 넘어졌어. 자주 눈에 띄지만 우리는 있으면 자만하고,
순전한 결핍도 쓸모가 있는 법.
p120
에드거 최악을 말할 수 있는 한 최악은 아니다.
p121
에드거 팔을 이리 주세요. 일어나요. 어때요? 설 수 있소? 섰군요.
글로스터 너무너무 쉽게요.
에드거 불가사의합니다. 절벽 꼭대기에서 당신과 헤어진 게 뭐였지요?
글로스터 가엾고 불행한 거지였소.
에드거 제가 이 아래에서 보았을 때 그의 눈은 두 보름달 같았어요. 코는 일천 개였고 뒤틀린 뿔들은 격노한 바다처럼 굽이쳤죠.
놈은 악마였으니 운 좋은 아버님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들로 존경받는 광명한 신들이 지켜줬다 생각하십시오.
글로스터 이제 기억나는군요. 지금부턴 견딜 거요, 고난이 ‘됐다 됐어.‘ 외치고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난 당신이 얘기한 그 놈을
사람이라 생각했소. 여러 번 ‘악마, 악마‘ 그렇게 말하며 날 거기로 인도했소.
에드거 무구한 인내심을 가지세요.
p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