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 '녹색 광선'을 무척 좋아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가... 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센터에 있을 때였다. 볼 때마다 마지막 장면에서 쿵쿵쿵 맘이 설레곤 했다. 녹색광선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그리고, "Oui!"
나는 네다섯번의 극장 관람 끝에 녹색 광선을 볼 수 있었고, 이경험만으로도 '녹색광선'은 나에게 인생영화가 되었다.
영화가 주는 감동도 특별했지만 영화 관람자체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우리나라에 번역·출간되지 않았던 작품인데, 작년에 책이 나왔다. 만든 사람의 정성이 듬뿍 느껴지는 책이다. 책이 나온 것을 알고 바로 사두었다가, 이제 읽었다.
이 책은 페이지를 넘기기가 속상할정도로 재미있다.캠벨 양에게 결혼하라고 보채는(??!) 19세기의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흥미로웠고, 녹색 광선을 보기위해 열정을 다하는 인물들도 무척 사랑스러웠다. 여기서의 녹색 광선은 그저 말랑말랑한 낭만이 아니다. 그것을 보기까지는 예측 불가능한 장애물과 많은 실망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 헤매는 행동에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포함되어있다. 인물들이 녹색광선을 보려고 항해를 하고, 섬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읽으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나는 왜 녹색광선이 보고싶은가 생각했다.
나는 늘 무언가가 보고 싶었다.
그럴때마다 영화를 찾았다. 텔레비전과 모니터는 도처에 있으니, 그것이 가장 가깝고 당연한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화관 안에는 스크린에 투영되는 또다른 광선이 있었다. 나는 혼자서, 가끔 둘이나 여럿이서 그것을 자주 쫓았다. 아주 열심히 쫓았다.그리고 책이 있었다. 책은 내가 움직일 힘이 없어도 펼쳐 읽기만 하면 그 안의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서는 더 확실한 혼자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더 개인적이다. 혼자라서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생각해보면 가슴 뛰던 모든 순간은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요즘은 영화관에 가기 보다는 책을 더 자주 펼친다. 나와의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움직일 힘이 전보다 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꿈과 사랑은 비틀거리기 마련이라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히브리서 11장이나 고린도전서 13장에나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그런 건 가닿을 수 없는 기적같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그런데 녹색 광선을 읽으니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독서도 빛을 쫓는 일이다. 이 책에는 심지어 수많은 석양과 아름다운 녹색광선이 나온다. 빛 없이는 읽을 수도 없다. 종이에 빛이 닿지 않는다면 글자도, 문장도, 문단도 없이 암흑뿐일 것이다. 그게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아무 힘이 없는 거라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 아니, 사방이 빛인데...
모두 찾는 과정이다. 여행이나 모험을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질문을 가지고 있는 한, 내가 찾고 싶은 것이 있는 한.나는 매일 한숨을 쉬면서도 두리번 거리고, 침대에 모로 누워서도 바깥을 상상한다. 매일 의심과 싸우거나 협상을 한다.
녹색 광선을 쫓던 캠벨과 올리비에는, 그 무엇을 찾았다.그것은, 찾던 것 이상이었다. 해피엔딩에 헤벌쭉 좋아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나에게는 낭만이란 가치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낭만이 실현되는 광경이 보고싶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과 사랑이 존재하는 세상이.
어쩌겠는가, 나는 생긴대로 살게 될 것이다. 찾고 찾으면서. 보고 읽으면서. 그러다가 이렇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되니까.녹색 광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이니까
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p35
)그녀는 긴 산책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몽상에 빠져들었다. 어떤 몽상이었을까? 녹색 광선과 관련이 있는 전설에 대한 상상? 자신의 마음속을 또렷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그걸 봐야만 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속?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p111
(...)그런데 그 소용돌이의 표면엔 참으로 놀라운 색채들이 있었답니다. 꼭 푸른색 비단 바탕에 수놓아진 큼직한 기퓌르 레이스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빛에 물든 포말 한가운데로, 거기서 보일지 모르는 어떤 새로운 색채를 찾으려고 뛰어들었던 거랍니다. 좀 더 앞으로, 좀 더 가자고 말입니다!(...)
-p134
"싱클레어 씨,"그녀가 다시 말했다. "녹색 광선은 제 소유물이 아니에요. 녹색 광선은 누구나 볼 수 있어요. 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동시에 보이는 빛이니까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거고요! 그러니까 원하신다면 저희와 함께 녹색 광선을 보러 가시면 돼요."
"기꺼이 가겠습니다, 캠벨 양."
"하지만 인내심이 많이 필요해요."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p136
"바다에서 위험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두려워하다니요, 저는 정말 겁내지 않아요. 감탄하는 걸 두려워할 까닭이 있을까요?"
-p160
"아니 캠벨양, 그럼 시인들이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꿈같은 이야기들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고집센 멍청이가 다시 말했다.
"물론이지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시는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작품처럼 거짓이라는 인상을 줄 겁니다."
"당신도요?" 아리스토불러스 어시클로스가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화가로 알고 있지, 시인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모두 같은 거예요." 캠벨 양이 말했다. "예술은 형태만 다를 뿐 모두 하나라고요."
-p187
"두 분, 두 분께서 그토록 열렬하게 말씀하시는, 소위 말하는 요정들 중에서 하나라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당신의 그 점이 틀렸다는 거예요. 그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당신이 안타깝네요." 꼬마 요정 중 단 한 명의 머리카락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듯싶은 캠벨 양이 다시 말했다. "사람들은 요정들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곳곳에서 나타나 인적 드문 협곡 사이를 미끄러지듯 날아가고, 깊은 골짜기에서 올라오고, 호수의 수면을 날아다니고 헤브리디스제도의 잔잔한 바다에서 뛰놀고, 북쪽의 겨울이 불러온 폭풍우 속에서 노는 모습을 본답니다. 그러니 제가 끝내 찾으려는 녹색 광선이, 수평선에 술 장식이 끌리는 발키리의 스카프라고 여기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요?"
-P189
"사랑하는 헬레나, 하지만 우리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 광선을 끝내 보지 못했어요!" 올리비에 싱클레어가 말했다.
"우리가 더 잘 본 거예요!" 젊은 부인이 속삭였다. "우리는 행복 자체를 보았어요. 전설에 나오는, 그 현상을 관찰하면 얻게 된다는 행복 말이에요! 사랑하는 올리비에, 우리는 그걸 찾은 것으로 충분하니까 녹색 광선을 찾는 일은 그걸 모르는 사람들, 그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해요!"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