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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ordin님의 서재
  • 뱀과 물
  • 배수아
  • 12,150원 (10%670)
  • 2017-11-10
  • : 3,936

 내가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순간들이 있다. 그 많은 순간들을 나열하자니 손가락 마디가 벌써부터 쑤셔온다. 나는 나인데, 나를 '여자'라고 그 사람이, 이 세상이 알려주는 순간들이 있었다. 너는 너.라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나는 많다고 썼다. 내가 여자로구나, 자각한 순간의 느낌들은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대게 수치와 열등감, 모욕 분노 슬픔 자괴감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대게 희미하거나 경계가 모호해서 개별적으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어떤 목소리가 내게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어쩔 땐 그것이 모두 한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일생에 걸친 뫼비우스 띠를, 그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앞으로 나아가지만 같은 자리로만 돌아오는 것 같은 무력감, 절망감. 그 감정들은 그 당시 정체를 깨닫지 못했을지언정 피부 아래에, 살과 핏속에 어떻게든 남아있어서, 언제고 파도처럼 돌아온다. (여러 모양과 여러 강도로.) 그리고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난다. 


 여자의 대표적인 다른 말은 남자이므로,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남자들은 어떨까? 내가 남자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까. 그 순간을 특별히 기억할까?


 배수아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미로를 따라간다. 설명하고 해석하기보다, 그 통로를, 좁고 어둡고 막연한 그 미로를 독자에게 안내한다. 이 세계는 낯설고 꿈인 듯 싶다. 아마도 어린 소녀들이 세상을 보는 모습이 반영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서사는 복잡하고 몽환적이지만 감정은 분명하다. 처절하고 슬프다. 슬프고 슬프다. 하지만 슬픈 데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마치 '갈라진 땅에서 솟아나듯 서'있던, 이 소설집의 첫 소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의 아이는, 마지막에 실린 소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소녀이며, 이 책에 실린 모든 소설의 여자아이들이다.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수미상관은 마치 여러 명이 결국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연대'하고 있다. 소녀이고 엄마이고 할머니인 그들이 모두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 부당함이나 내가 느낀바를 말하면, 그것은 곧바로 다른 언어가 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이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그런 상황에 대한 절묘한 은유와 묘사를 보았다. 나는 오히려 배수아 작가가 비유와 은유의 미로속에 숨겨놓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벽에 부딪히는 일상의 말보다 후련했다.


 우리는 쉽게, 그것을 알겠다고, 말하고 해석한다. 가끔 공감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감보다 해석에 급급한 것이 아닌지. 해석한다고 그 대상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린 너무 급히 해석하고 알아채려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직관'이란 이런 공감,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겹겹이 쌓은 이야기의 층이 너무나 섬세하고 날카롭고 뜨겁다. 

나는 이야기를 가만히 손에 들고 읽었을 뿐인데, 이 세상의 누군가 단 한명은 기꺼이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겠다고, 너를 해석하지 않고, 너의 아픔과 수치와 분노를 나도 느낀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사라지지 말라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될지언정 우리 회귀해보자고 따뜻하고 작은 손이 가만히 내 손을 쥔다. 

  



소모된다는 것은, 모습이 다시 돌아오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뜻이죠. 사라지는 방식은 테크닉이고, 회귀하는 방식은 에너지라고 했어요.
-p27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p94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비순차적인 시간을 몽상하는 어떤 자의식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
-‘뱀과 물‘p191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그건 모두 소문이니까. 소문은 그냥 꿈같은 거란다. 소문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꿈은 우리를 해치나요?"
"꿈은." 여승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문질러 껐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뱀과 물‘p204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뱀과 물‘p223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힘차게, 그리고 슬픔 없이 끝내는 편이 나았다.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시라고는 평생 한 편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고, 오직 직관에 기대서 슬픔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38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이 되는 것, 형체가 사라져버리는 일이었어요.(...)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46
(...)너무 이른 죽음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그런데 내 느낌이란 무엇일까? 형체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가방과 같은 이것, 파국을 향해 산란되는 이것.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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