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물을 건너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마트에
가보니 이국적인 과일들이 꽤 많아 보인다. 남편과 이것저것 눈으로 휘적거리다 “파파야 멜론이 이젠 한국에서도 나오나 봐?”했다. 지구가 어지간히 따뜻해지긴 했나 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겨우
사먹을까 하던 과일이 3월에도 눈발이 거세게 날리는 이 곳에도 판다.
이 코너를 돌고 저 코너를 살펴보니 해외에서만 볼 수 있던 간식들도 매대에 꽤 많이 진열되어 있다.
굳이 비싼 비행기표를 살 필요가 있나,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 싶으면 이 곳에서도 팔고
있다.
내가
읽은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식민지 시대 조선의 수도, 경성 땅에서 유행하던 간식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단순히 “이게 있다, 저게 있었다.”라는 내용보다 더 심층적으로 그 시대에 유행했던 음식
하나하나를 챕터로 나눠서 그 시대에 연재된 문학작품이나 신문 사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출판된 연대기
등을 통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 판매되었는지, 그
식문화를 자세히 보여준다.
나는
오늘 글을 쓰기 앞서 출판사의 서포터즈라면 어떤 글이든 쓸 터이니 나는 내 기억과 방식에 맞는 글을 써 봐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이 음식의 ‘기억’을
훑는 것이니 나도 이 책 속의 음식 중 나의 기억에 생생한 한가지 음식에 대하여 책의 내용과 함께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두를 멜론으로 열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멜론은 귀한 과일이었다. 수박도 아닌 것이, 참외도
아닌 것이, 가격은 또 어찌나 비싼 지 선물이라고 해서 들어와야만 한 번 먹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말주변 없이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언제 성질을 부릴지 모르는 내 아버지도 멜론 앞에서는 “메롱, 메롱, 이름도 재밌다.”하며 나름의 개그를 날려 어린 나와 동생들을 웃게 만들었으니 멜론은 여러모로 귀한 과일이 분명하긴 했다. 우리집에 멜론이 온 것은 아버지의 거래처에서 선물로 갖다 준 것이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니면 병환 중이던 엄마의 문환 차 선물로 가져온 바구니 속 물건 중 하나일지도...)
그
귀한 멜론은 모던보이의 선두주자였던 소설가이자 시인 이상이 죽기 직전 자신의 아내인 변동림에게 죽기 직전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나는
철없이 센비키야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이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서 깎아서 대접했지만 이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106쪽)
1930년대
문학작품 속에서도 자신의 집 가정교사로 들어온 정순에게 흑심을 품은 조 두취가 미스코시백화점 4층 식당에서
무엇이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시키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그 당시 그들이 시킨 것은 “매른”, 즉 멜론이었다. 요즘 날씨가 더워지면 멜론을 통째로 썰어서 빙수로
파는 것이 한 2~3만원 정도로, 꽤나 비싼 간식이라 할
수 있겠는데 당시에도 가장 인기가 있고 비싼 것이 멜론이었다고 하니 “과류의 왕”이라 불렀던 당시의 명성이 꽤나 대단하다 하겠다. 당대에 전라남도
지역에서 온실재배를 했다는 것도 신선한 정보였다. 어떻게 길러졌는지도 신기하지만 맛이 좋아서 일본에도
판매가 되었다고 한다. (식민지였으니 수출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게 씁쓸하다.)
경성의
유행은 일본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으니 책에서는 일본에서 어떻게 해당 식품들이 유행했는지 흐름도 잘 보여준다.
첫 장에 소개된 커피의 경우 끽다점과 순끽다점을 나눠 홍보하였다 하는데 이는 일본에서 여종업원의 에로틱한(!) 서비스가 있으냐 마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하니… 커피 한 잔에도
성(性)이 연결된다는 것이 참 성진국스럽다 싶었다.
책은
총 8장에 걸쳐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커피 – 만주 – 멜론 – 호떡 – 라무네
– 초콜릿 – 군고구마 –
빙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읽는 내내 침이 고여 힘들었다. 이 책을 쓴 작가의 <경성 맛집 산책> 역시 읽었고, 그 이후에도 책 속에 있고 아직도 서울에서 운영 중인 설렁탕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시대를 거슬러올라 그 당시 식문화를 주제에 맞게 잘 설명한 작가의 필력이 이번 책에서도 잘 그려져서 읽는 내내
복잡한 생각 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요 몇 달 간 대내외 정치뉴스로 얼마나 머리가 아팠던가, 이럴 땐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를 즐기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
요 몇 주 전에
일본에 사는 동생네 집에 다녀왔는데 라무네 한 병을 사먹고 싶다 했더니 왜 그 맛없는 걸 먹고 싶어 하냐고 타박을 하여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가 5장 속 라무네의 이야기가 왠지 모르게 사무쳤다. 딸강딸강 병 속의 구슬과 푸른 청량함이 자꾸 생각나기까지 하니 내일은 마트에 가서 라무네를 하나 사 먹어야겠다.
"나는 철없이 센비키야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이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서 깎아서 대접했지만 이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