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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주님의 서재
  •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
  • 김정환
  • 23,400원 (10%1,300)
  • 2025-06-25
  • : 1,487

지난 1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을 광장에서 보냈다. 거리에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 나라의 미래가 그래도 어둡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가도, 일상에 돌아와 뉴스를 보고 온갖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마주할 때면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은 괴리감이 밀려왔다. 심지어 우리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후 광장을 통해 이들을 파면시켰지만, 불과 몇 년 이후 그들보다 어찌보면 더한 일을 저지른 내란수괴를 우리의 손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리지 않았는가(난 그를 뽑지 않았긴 하지만...)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는 이처럼 "축제와 탈진을 오가는(27쪽)", 마치 진자운동과도 같은 일련의 과정이 우리의 역사에서 왜 자꾸만 구간반복하며 전개되는지를 진단한다. 이를 위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극'을 평가한다. 저자는 그 평가를 위해서는 "극의 주제는 무엇인지, 어떤 서사구조를 이루고 있는지, 작품이 관객에게 어떤 미적/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지, 그리고 향후의 공연을 어떠헤 개선할지" 물어야한다고 말한다(22쪽). 이를 위해 사용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상상계'이다.

책에 따르면 상상계는 "이미지들의 방대한 집적이며 이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문화적 스크린"이라 볼 수 있는데,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 무수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특정한 상상계의 제약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즉,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나타나는 상상계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제약한다는 것이다(39쪽). 이와 같은 한국의 상상계는 "죽음과 결집이라는 두개의 스펙터클을 양축으로 하여 진행"된다(52쪽).


죽음은 "몸과 몸의 부딪힘이 낳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 사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는 1980년대에 국한되지 않고 최근까지 반복된다. 예컨대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정농단 시위의 최전선에 섰던 일, 그리고 가장 최근의 내란 시위에서도 같은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이처럼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폭발적으로 정점에 치닫는 순간마다 죽음이 핵심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죽음'과 '결집'이라는 스펙터클을 양 축에 둔 한국인들의 상상계 속에서, 역사와 민주주의는 자질구레한 일상이 아니라 예외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119쪽).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상상계가 오싹하거나 뜨겁지 않은, 미지근한 일들은 민주주의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참혹한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여 민주주의를 구원하고 떠나버리는 메시아로서 민을 상상하고 수행하는 오랜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나 정치가 비일상적인 장면에서만 발생한다는 한국인의 감각은 매일 마주하는 불의와 불합리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우리는 뜨거운 광장의 열기보다, 식은 정치의 일상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민의 마음속 스크린에 가장 먼저 영사되는 장면이 바로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직면한 몸의 이미지다.

- P86
민은 상자 속에서 모습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생명이 없이 굳어 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 포효하는 오데사의 사자 석상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민이 하나의 신체로 결집하며 동원이 이루어지는 이 기적적인 현상은 사람들이 도시의 한 장소로 모여드는 장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같은 도시 내에서도 개별화된 몸으로서 각자의 리듬과 궤적과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엇갈리던 민은 물리적•신체적(physical) 동원이 이루어짐으로써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향하여 움직인다.

(...)

하나의 신체로 결집하기 위해 모여드는 민은 갈가리 찢긴 몸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본류에 합류하기 위해 흘러오는 지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P255
이렇게 결집한 몸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결의 이미지는 한국 민주주의의 상상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이룬다. 광장과 거리가 인파로 가득 차서 넘실대는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정점이자 이상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며, 한국 민주주의는 결국 이 장면을 향해 흘러가는 드라마로 여겨진다.- P256
이제 나는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무대에서 끌어내림으로써가 아니라 누구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스펙터클이 난무하는 무대 외에는 조명이 꺼져 있는 극장에 들어섬으로써가 아니라 누구나 고르게 햇살을 받는 광장에 나옴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다시 배우고 몸에 익히고자 한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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