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투루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 중 하나는 누군가의 단점을 나의 노력만으로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착각에 자주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비단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커다란 실수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십 년 결혼 생활을 이어 온 부부 사이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 혹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신을 향한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상대방의 단점을 쉽게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상대방의 단점을 능히 가리고도 남을 만한 다른 장점이 상대방에게 존재하거나 그와 헤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켰거나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데서 비롯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그와 같은 판단에 도달할 만큼 자기 객관화의 면모가 뚜렷한 사람은 흔치 않을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지사지의 태도는 숫제 경험조차 해 본 적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가장 이기적인 동물일지도 모른다.
"전시회를 본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아클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침대에 누웠다. 따뜻한 바람과 이웃집의 금속 풍경 소리가 들어와 방을 가로질렀다. 사빈은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테스코까지 걸어가서 장을 봐 온 다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타임 줄기를 넣고 구운 닭고기와 마늘, 주키니 호박이었다. 이 여자는 요리를 할 줄 알았다. 카헐은 지금도 그것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설거짓감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화가 났는데, 그가 전부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녀가 밤새 불려야 한다고 말했던 오븐용 그릇만은 예외로, 그가 월요일에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p.21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에는 표제작인 '너무 늦은 시간'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남극' 등 단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얇은 책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 또한 가볍고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너무 늦은 시간'에서 주인공인 카헐은 어느 회의장에서 만난 사빈과 사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인색한 데다가 남성 우월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한 카헐은 자신의 집으로 짐을 옮긴 사빈과의 결혼 준비 과정에서 여러 번 충돌한다. 사빈은 카헐의 직장 동료인 신시아를 통해 카헐의 행동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확인한다. 사빈은 카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지만 카헐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들이 다만 아일랜드 남자들의 관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학 시절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남동생이 어머니가 자신의 접시를 들고 식탁에 앉으려 할 때, 의자를 홱 빼버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바닥에 넘어졌던 것은 물론 접시가 깨지고 접시에 담겼던 음식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못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어져서 옆으로 누웠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난 후에야 잠이 왔고, 그는 어느새 잠의 위안과 새로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p.44~p.45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한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뵐 하우스'라는 작가 레지던스에서 집필 작업을 하려던 여성 주인공이 다짜고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독문학 교수라고 소개한 남자는 집을 둘러보겠다며 무례하게 부탁한다. 글을 써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인공은 마지못해 응한 남자의 방문이 영 못마땅하지만 준비한 케이크를 대접한다. 남자는 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오히려 주인공을 타박하기에 이른다.
"얼마나 끔찍한 남자인지! 정말 끔찍하고 불행한 남자야. 그녀가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갔나? 게다가 얼마나 수고를 들였는지 생각하면...... 그녀는 케이크를 보면서 창밖으로, 그의 뒤에다가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케이크를 냉장고 깊숙이 넣고 와인을 한 잔 따랐다." (p.77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중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로 시작하는 '남극'은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여자의 경험을 다룬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말을 준비하여 놀라게 한다.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은 대략 10년씩의 시차를 두고 쓰였다지만 작가 특유의 문체는 비슷하고, 주제 역시 일관되게 흐른다. 2022년에 발표된 '너무 늦은 시간'과 2007년에 발표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1999년에 출간된 '남극'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작가의 생각과 문학적 표현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로 보이지만, 특이하게도 클레어 키건은 시간의 추이에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주제를 각각 다른 소재로 선보이는 3인 3색의 색다른 매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트 폭력과 남녀 간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서 결혼 전의 두 남녀의 갈등과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를 제삼자적 관점에서 보게 되는 여자와 경험해보지 못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압축적인 이야기로 담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모텔 살인 사건도 그렇지만 남녀 간의 관계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단점이 아주 작게 보이거나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지속되는 까닭은 인간의 적응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위중한 폭력 앞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클레어 키건은 각각의 상황을 여성의 입장에서 쓰고 있지만 비단 이것이 어느 한 편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남녀 간의 교제를 법으로 금할 수도 없고... 사랑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가깝고 사랑에서 벗어나는 길은 너무나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