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나는 새롭게 맞는 날들이 특별한 감정의 소모가 없는 무던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픈 또는 지나치게 화가 나는, 예컨대 평소에 비해 과도한 감정적 소모조차 견디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쇠약해지는 기력 탓에 극심한 감정의 소모에 필요한 에너지를 미처 충당하지 못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검증한 바는 없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가는, 이를테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남들에게 까칠하게 대하지 않는 수더분한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역시 내게 일어난 큰 변화 중 하나라면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창밖에는 한겨울에도 자주 보지 못하던 눈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세세한 흔적들도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그 기억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조차 한낱 부질없는 꿈임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았던 흔적 역시 초봄에 내리는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쉽게 녹아 사라질 수만 있다면 저승으로 향하는 발길이 조금 가볍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 작가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고 있습니다. 100여 쪽 남짓의 얇은 소설이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인 듯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쓴 정여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소설에는 삶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가, 인간의 부조리와 상실과 치유와 극복의 모든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군가 내 귓가에 집요하게 무언가 간절한 사연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위대한 사랑과 희망의 목소리를.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상실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시작되고, 지속되고, 항상 우리 마음속에서 끝내 살아남을, 위대한 희망과 사랑의 이야기를."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차량들이 줄을 지어 달려갑니다. 이렇게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우리는 잊고 있었던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불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했던 감정들을 야금야금 소모합니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기진한 듯 나른한 피곤이 몰려옵니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눈꺼풀의 무게만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