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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님의 서재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 정기현
  • 16,650원 (10%920)
  • 2025-06-18
  • : 5,320

유능한 편집자가 인기 작가로 탈바꿈하는 사례는 불가능하거나 희귀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흔한 사례도 아니지만 말이다. 타인이 쓴 글에 대해 조언하고 격려하는 일과 자신이 직접 나서서 글을 쓰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일 때문이든 취미로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당연히 글도 잘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양자 사이에 서로 긴밀한 연관은 있을지언정 '반드시'로 귀결되는 건 아닌 듯하다. 나 역시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글을 쓰는 건 그닥 즐기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게다가 이걸 평생의 업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나의 이런 성향은 책을 읽고 숫제 기록도 하지 않는 잘못된 습관을 오래도록 유지시켰던 바, 어떻게든 이를 고치고 바로잡겠다는 명목으로 오죽하면 영양가도 없는 블로그를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별반 나아진 것도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정기현 작가 역시 스타 편집자에서 신인 작가가 된 케이스이다. 작가의 첫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고 난 나의 감회는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자' 결심하거나 생각해서 나온 글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쌓이고 쌓였던 것이 자연스레 넘쳐흘러서 비로소 세상에 나온 책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인간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때가 되어 마땅히 나와야 할 게 나왔다는 생각은 어쩌면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이 끝없이 걷는 모습으로 일관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기은, 새미, 승주를 통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들이 마주하는 다른 풍경들을 끊이지 않고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나온 시간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 탓인지, 아니면 교회에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자주 오는 것인지, 낯선 이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끝나지 않는 긴긴 얘기를 늘어놓았다. 교회에 와서야 털어놓는 이야기라는 것이 대개 먹고사는 문제와는 관련이 없으나 그 나름대로는 충분히 무거운 것들이라 이들의 장황한 이야기는 붕 떠올라 당사자만 아는 리듬대로 흘러갔다."  (p.83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중에서)


정기현의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빅풋', '발밑의 일', '검은 강에 둥실', 마음대로 우는 벽세계', '농부의 피',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바람 부는 날' 등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는 신인 소설가인 만큼 소인(小人) 새미가 임준섭의 집에 숨어들어 지내는 며칠 동안 인간이 소인의 존재를 눈치채면 그 즉시 처단된다는 그들만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새미는 왠지 그에게는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임준섭을 불러보는데, 그는 의외로 차분하기만 하고, 집안의 고요가 깨져 기쁘다는 듯 행동한다는 내용의 '발밑의 일'처럼 실험적인 작품도 선보인다. 물론 큰 발을 갖고 있는 새미가 발 때문에 흐려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슬픔을 다룬,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의 '빅풋'과 같은 작품이 작품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신발 자체로만 본다면 그리 무시무시한 크기까지는 아니었는데도 새미를 먼저 알고 새미 없이 그 신발들을 보게 된다면 그 뒤로도 한동안 발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만드는 신발들이었다. 새미는 여전히 실종 상태인데 발 크기에 놀라 마땅한 슬픔을 뒷전으로 밀어둔 것처럼 보일까봐 나는 신발들이 선사한 놀라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p.15 '빅풋' 중에서)


소설 '빅풋'에서 새미는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발에서만 자세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대표성이 발의 크기가 아님을 은연중에 밝힌다. 동네 곳곳에서 발견되는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되는 낙서를 보면서 기은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김병철'이라는 인물과 그에 대한 사연을 찾아 나서게 되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기은이 자신이 새로 발견한 사실을 준영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그린 '슬픈 마음 있는 사람'과 여름방학에 꾸었던 꿈을 소재로 다룬 '검은 강에 둥실', 뻐꾸기와 파쿠르의 상상력을 다룬 '마음대로 우는 벽세계', 우연히 발견한 비옥한 땅을 보면서 자신에게 농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승주의 이야기를 다룬 '농부의 피', 외고를 목표로 노력해 온 승주가 어느 날 노는 아이들의 무리인 '버들치'와 어울리게 되면서 달라지는 삶의 패턴을 그린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재건축을 하기 위해 펜스가 쳐진 아파트 단지를 멀리 돌아 출근하는 대신, 펜스를 뚫고 한가운데로 걸어보자고 결심한 승주에게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을 그린 '바람 부는 날' 등 작가는 다양한 소재에서 얻은 여러 상상력을 통해 우리 삶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길에도 성격이 있다면 고갯길은 무척이나 음흉한 성격일 것이다. 꼭대기에 다다를 때까지 너머의 풍경을 감춘 채 고개의 이쪽 면만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일 누군가 푸른 초목이 무성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면, 그가 멈추지 않고 걷는 이유는 내리막길에도 그 녹빛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그 너머가 바위산이면 어떡하려고? 얼음산이라면? 절벽이라면?"  (p.264 '바람 부는 날' 중에서)


며칠째 날이 무척이나 차다. 동장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갑작스럽거나 느닷없는 것이어서 자신의 삶에서 받는 충격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멈춰 서거나 기운을 잃고 쓰러질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좋은 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네 모습을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맬 때 한 편의 소설이 가리키는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다 보면 내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잠시 멈추어 서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지쳐버린 자신의 삶을 잠시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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