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서는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의 남자 한 명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옆동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손에는 꽃다발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든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누군가의 생일이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에 참석하는 차림이었다. 검은색 면바지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머리도 한껏 멋을 부려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엔 여드름이 군데군데 솟은 것으로 보아 아직은 성인이 되지 않은 듯한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뛰어가는 남자를 향해 마주 보고 달려오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반가운 포옹을 나눈 후 어렵게 떨어져 나란히 손을 잡은 후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멋을 내고, 선물을 준비하고, 혹시 잊은 게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에 확인을 거친 후 집을 나서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누군가를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되풀이하여 낮에 만났던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똘망똘망 정신이 맑아지는 듯 느껴졌던 경험. 사람은 그런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가슴 설레고,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한없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열정과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사람은 행복하기만 하면 어떤 규율도 견뎌 낼 수 있다. 글쓰기 습관을 깨뜨린 것은 바로 불행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투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짜증을 부리며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깨달았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랑이 시작과 끝이 있는 정사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랑이 끝난 마지막 순간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60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부터 늙음을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을 만나는 일이, 출가한 자식을 만나는 일이, 꽃 한 다발을 들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 늘 가슴 설레고 기다려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청춘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흘러간 경험으로부터 너무나 빨리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건 젊었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때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