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늠하는 저울추는 항상 동일한 무게로 당신의 삶을 저울질하지 않는다. 때로는 과도하게 무거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찍어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저울추로 당신의 삶을 들뜨게도 한다. 그것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항변해도 어쩔 수가 없다. 당신의 삶을 되돌리거나 새로운 환경에 떡하니 내놓을 방법은 그 누구에게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일러 '운명'이라거나 기타 명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불경한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힘겨웠던 개개인의 지난 삶에 대한 분풀이나 보상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대체불가의 크고 작은 불행에 대해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치료의 80퍼센트는, 그 이상은 아닐지 몰라도 바로 너야. 환자라고. 이제 의사들한테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 건 그만둬. 의사들한테는 네게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필요한 건 완벽한 의사가 아니야. 그들도 사람이야. 우리 나머지랑 똑같이 결점을 지닌 인간. 너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해. 나는 록산의 솔직함에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네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 의사들뿐 아니라 네 가족들도. 록산이 다리를 꼬고, 왼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기 시간을 나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p.365~p.366)
수잰 스캔런의 에세이 <의미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녀가 겪었던 이런저런 삶의 불행에 대해 조용한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다. 1992년, 스무 살의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극심한 식이 제한과 자해 끝에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장기 입원이 정신의학의 표준 치료로 여겨지던 시절이었고, 의사들은 환자의 증세를 과거의 외상과 연결하려 애쓰던 시기였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작가는 가족들의 침묵 속에서 애도의 과정도 없이 성장했고, 뉴욕으로의 이주와 식사를 중단하겠다는 결정, 그리고 첫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의 기원이 당시 의사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 하나에서 발원했을까. 작가의 기록은 정신질환을 겪었던 암울했던 시기의 회고록이자 광기와 의학에 대한 문학적 전통을 탐구한 작가 나름의 고찰이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은 고요함과 하나에 집중하는 정신의 조합이다. 하나의 문제와 함께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것." (p.115)
"그 시절, 예술은 하나의 빛이었다. 나에게 통곡과 그리움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경계선 위에서 혹은 경계선 바로 너머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p.256)
총 3부로 이뤄진 이 책에서 작가는 작가 개인의 사적 기록과 자신이 탐구한 여러 문학인으로부터 옮겨 온 적절한 인용,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과 불합리한 사회 인식에 대한 비판 등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문학비평의 한계를 회고록으로 확장하고 있다.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하여 여성 작가의 계보를 이었던 샬럿 퍼킨스 길먼,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줄리아 크리스테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재닛 프레임, 시네이드 오코너 등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했던 자아를 발견하고, 정신질환의 길고 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서가 나를 구원했다. 어리석게 들릴 수 있는 말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하기도 하다. 과대망상이라거나 낭만적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더 심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일 수 있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고, 나에게는 진실이었다. 만약 그날 밤 내가 그 서점에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낭독을 듣지 않았고,『분노한 여자들』을 읽지 않았다면, 오드리 로드를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p.431)
작가가 자신이 겪었던 정신질환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구원자는 수년간 복용한 약이나 비싼 상담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작가에게 삶을 뒤흔드는 욕망의 언어를 제공했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나 의료의 틀이나 형식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오드리 로드의 '암 일기'를 읽음으로써 작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기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했던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여분을 이쯤에서 포기하고자 한다는 건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존재했던 자신의 문장,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 순간에 우연히 읽었던 한 권의 책, 어느 광고판에서 우연히 읽었던 하나의 문장, 또는 늦은 밤 어느 포장마차에서 들었던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살리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문장을 다시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이 이따금 눈송이처럼 흩날리곤 한다. 등산로에도 켜켜이 쌓인 낙엽으로 인해 지면의 고저를 가늠하기 어렵다. 비탈길을 오르는 등산객이 가랑잎을 밟고 미끄러지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인생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낙엽만 무성한 허방을 밟을 때도 있고, 때로는 길 위에 넘어져 피를 철철 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목소리, 인생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그 하나의 문장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문장을 되찾기 위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