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 난다,는 속담이 있다. 일을 그르치고 난 뒤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고 궁리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속담이다. 사업도 그렇고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이런저런 미련 때문에 끊어야 할 시점을 놓쳐 낭패를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렇게 시기를 놓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결정을 내렸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을 복기하면서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렸더라면' 혹은 '더 냉정했어야 했는데' 하는 식으로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면서 아픈 상처를 곱씹는 것이다. 물론 작두로 무 자르듯 자신의 일에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렇듯 미련이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다는 사실과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은 어떠할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했던,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삶을 과감히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항상 OECD 평균을 2배 이상 웃돌뿐만 아니라 2024년만 하더라도 자살자는 1만 4천872명으로 하루 40명 정도였다. 36분마다 한 명씩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얼마 전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는 '조력존엄사'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그 드라마에서 말기 암 환자인 상연은 오랜 친구 은영에게 스위스 동행을 부탁하고, 은중은 망설임 끝에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상연의 대사이기도 했던 "적어도 나한테 고통을 거절할 권리는 있잖아?"라는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나는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으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렸었고, 수시로 책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친구도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는 자신의 엄마의 죽음에 동행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는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작가가 인터넷에 올린 부고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8월 3일, 스위스에서 하늘나라에 가셨어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엄마가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엄마는 스스로의 삶과 죽음을 선택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어요. 엄마, 안녕. 언제나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사랑해. 많이많이." (p.183)
책은 엄마가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고 1년 후 다시 암 전이 판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망이 없음을 확인한 엄마와 딸은 조력 사망을 결정하고 그 지난한 과정을 다룬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와 출국과 엄마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기록한 '스위스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후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의 '애도 일기'로 구성된 이 책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지만 행간에서 묻어나는 슬픔의 기운을 지우기 어렵다. 2025년 현재까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한 한국인은 1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삶을 결별한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추모식에서 작가가 엄마에게 쓴 편지 일부를 옮겨본다.
"제가 너무 사랑했던 그리고 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제게 주었던 엄마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요. 이모랑도 얘기한 것처럼 우주에 혼자 떠 있는 기분입니다. 제 삶에 빛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엄마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또 우리를 위해 용감한 선택을 했으니 일상을 지키라던 말,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행복하게 살라던 엄마의 말에 따라 저도 용기 내어 살아가려고 합니다." (p.277)
얼마 전에 나는 연로하신 장모님과 저녁 자리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장모님은 주변에서 병환에 시달리는 몇몇 분들의 사례를 말씀하시면서 '가는 게 문제야'라면서 한숨을 쉬셨다. 정말 가는 게 문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그에 비례하여 수명도 크게 늘었지만 더불어 죽는 것도 힘들어졌다. 완쾌의 가능성도 없고, 고통이 극심한데도 그 고통을 끊기 위해 맘대로 죽을 수도 없다. 가을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죽음과 상실의 문제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오래 살았다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은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남들보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을 충분히 경험했던 바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즐겁게 살 용기가 내게는 없다. 적당한 때가 오면 나도 역시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할 생각이다. 아파트 인근의 공원에서는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종일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선 공원의 나무들은 가을빛이 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