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고전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고전 작품이 현대 작품에 비해 무척이나 담백하구나, 하는 것이다. 담백하다는 말은 사실 좋게 표현한 것이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고 할까 아무튼 소설의 구성이나 표현이 너무도 솔직해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주제나 결말을 지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본인의 의도나 결말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머리를 굴려야 할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비해 현대 소설이 발전한 것은 작가의 의도를 얼마나 꽁꽁 숨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즉 작가의 숨은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기술을 얼마나 완벽하게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집착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것은 비단 소설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던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남을 속이는 데 온갖 기술과 편법을 동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고전은 오히려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나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목만으로도 그 주제를 짐작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문체 또한 간결하고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까닭에 나와 같은 현대인들은 작가의 의도를 곱씹는 데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도 저 멀리 소설의 결말 쪽으로 미리 달려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나쁜 독서 습관이 비단 나 하나의 문제일까마는 나는 몇 번이나 반성하며 톨스토이의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의미를 깨닫는 데 집중하고자 했다.
"사람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p.5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외에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 '촛불', '예멜리얀과 북', '무엇 때문에'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음 직한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무척이나 간결하고 단조롭다. 복잡한 구석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른다. 가난한 구둣방 부부가 예배당 근처에서 알몸의 젊은이를 발견한 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발견한 삶의 진실과 그 젊은이는 사실 하나님에게서 벌을 받은 천사였다는 내용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에 실린 소설의 대부분은 우리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라고! 사람을 죽이는 건 물론 죄가 되지만 그놈이 인간인가? 착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분명 죄가 되지. 그러나 그런 개만도 못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인간을 위해서 미친개는 죽어야 해. 그놈을 죽이지 않으면 죄만 커질 뿐이야. 놈이 사람을 괴롭힌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고. 만일 이 일로 고초를 당한다 해도 사람들을 위한 일이야. 모두들 우리에게 고맙다고 할걸 우리가 당하고만 있으면 놈은 우리를 모두 죽이고 말 거야." (P.170 '촛불' 중에서)
소설 ;촛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심지어 계엄령을 통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독재자, 내란 수괴의 원흉조차 우리 손으로 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소설 '촛불'은 마태복음 5장 38절~39절로 시작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평생 민중들과 함께했던 톨스토이. 물론 19세기 당시의 민중들은 선량함과 잔인함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절대다수의 농민들이었지만 톨스토이가 바랐던 것처럼 그들이 사랑, 용서, 구원을 통하여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기는 어려웠을 터,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작품을 통해 그 바람을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한 번은 우리 곁을 지나갈 때 러시아인 의사가 '너무 심하게 때리지 마십시오'라고 병사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사정없이 내리쳤어요. 그가 내 곁을 두 번 지나갔을 때에는 이미 자기 발로 걷지 못하고 끌려갔습니다. 그의 등은 너무나 참혹해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결국 쓰러져 실려 나갔고 다음에 두 번째 사람이 끌려 왔어요.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또 네 번째 사람이 끌려왔습니다. 모두들 쓰러졌어요. 어떤 사람은 겨우 살아서 들려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것을 서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처형은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오후 2시까지 여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P.226 '무엇 때문에' 중에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있는 유흥식 추기경은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안에, 저 깊숙이 살아있는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면 더 이상 (선고를) 지체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보다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적어도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잔인하며 그들의 입에서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말은 더 이상 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그 사실을 눈과 귀로 확인하곤 한다. 자신의 의도나 목적을 교묘히 숨기는 기술을 끝없이 연마해 온 현대인은 자신의 말과 글에서도 그것을 숨기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기에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역시 입으로는 아멘을 외치면서 헌재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죽이자는 구호를 서슴없이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타인을 속이기 위한 작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